
서론
디즈니영화 ‘라이언 킹’에 보면 사자가 양을 잡아먹지만 결국 죽어서 풀의 비료가 되고 그 풀을 다시 영양이 먹는다는 대사가 있습니다. 영양은 다시 사자의 밥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와 모든 피조물들은 다 삶의 거대한 고리 안에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삶의 일부라고 합니다. 죽음이 삶의 일부이기에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죽음이 두렵기에 만든 말들입니다.
양이 죽어도 풀로 살고, 풀이 죽어도 영양으로 살고, 영양이 죽어도 사자로 사는 순환고리가 자연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자연 질서에는 거대한 힘이 있고, 이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잘 지키면 아름답고 의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부활이란 이런 자연의 순환고리가 아니라 삶의 연장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한 번 세상에 태어나면 죽음과 부활을 거쳐 하늘나라의 삶으로 연장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26에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십니다. 부활은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죽었다가 살아서 다시 죽은 나사로를 우리는 부활했다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미 부활의 삶을 삽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믿음으로 이미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주님이 다시 오신다면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의 삶을 살 것을 확실히 믿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헨리5세’에는 “우리는 우리와 함께 죽기를 두려워하는 자들과 같이 죽고 싶지 않노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두려워하는 자,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거부하는 자를 위해 예수님은 죽지 않으십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 다시 부활하시지 않습니다. 또 이런 자들에게는 죽어도 사는 영원한 삶이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부활의 은총도 없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가 되고, 시체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의 순리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죽기가 쉬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죽기가 어려우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죽음에 대한 논리가 여럿이 있습니다. ‘죽음수용’이 있고, ‘죽음거부’가 있고, ‘죽음연결’이 있습니다. 죽음연결이란 죽어서도 살아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죽어서 가장 오래 사는 민족이라고 펄벅여사가 말했습니다. 우리민족은 죽었어도 마치 산 것처럼 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처럼 제사를 드리고, 세상을 떠난 조상의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절하고, 밖에 나갈 때 인사하고, 들어와서 문안한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은 극과 극의 상반된 모습입니다. 서로 상반되는 것 같지만 동시에 죽음과 부활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활의 조건이며, 부활은 십자가의 결과입니다. 이런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는 예수님의 부활로 부활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천지가 어두워지고, 해도 빛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제자들은 낙심했고, 제자들 모두가 한 집에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로 하여금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하였습니다. 빛을 잃었던 해가 다시 빛을 얻었습니다. 움츠렸던 제자들은 다시 환희하며 밖으로 나왔습니다. 부활은 그들에게 희망이며 교회 설립의 기초였습니다.
부활절을 영어로는 ‘Easter’ 즉 ‘동방절’이라고 합니다. 동쪽은 생명의 자리입니다. 동방은 빛의 나라입니다. 빛은 생명이 활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며, 빛이며, 활기입니다.
안식 후 첫날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이 확인한 예수님의 무덤은 이미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이 묻히셨던 무덤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빈 무덤은 그들에게 놀람과 설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에게 다시 생기를 불어넣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밖으로 나와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여 활기차게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8:6에는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왔을 때 무덤은 이미 비어 있었습니다. 무덤은 죽음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은 더 이상 무덤에 머물러 계실 수 없었습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라는 말은 무덤에 장사 지낸 예수님은 이미 무덤 밖에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물위를 걷기도 하시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문이 닫혀 있었지만 안으로 들어오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간을 초월하시고 시간을 지배하시기에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무덤 안에 갇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2:24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합니다.
빈 무덤의 광경을 성경은 아주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마포가 따로 놓여 있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따로 개켜 있었습니다. 헬라어로 “개켜 있다”는 말은 ‘둘둘 말려 있다’, ‘그대로 접혀 있다’는 뜻으로 손 댄 흔적이 없는 원래대로 접힌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세마포를 쓰신 적이 없다는 표현입니다.
‘성육신’(incarnation)이란 말은 라틴어로 육신이란 뜻의 ‘카르누스’(carnus)에 들어오셨다는 ‘in’이 합성된(in-carnus)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 속으로 들어오셔서 살을 가진 존재가 되셨습니다. 요한복음 4:24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합니다. 영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죽으셨는데 부활하시므로 다시 육신을 회복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육신으로 다시 가지고 살지 못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영이심을 믿으면 부활도 믿을 수 있습니다.
빈 무덤을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 그리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한 결 같이 무덤이 빈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누군가 혼자 본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보았고, 이미 확인한 것이 예수님의 빈 무덤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부활장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확실한 증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죽으셨고, 다시 사시고, 사신 다음에 게바에게 보이셨고,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고, 500여 형제에게 보이셨고, 주의 형제인 야고보에게 보이셨고,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고 마지막에 바울 자신에게 보이셨다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증언이면 거짓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보았으므로 거짓말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집단 환상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500명이 동시에 환상을 볼 수 있겠습니까?
신학자 불트만은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에서가 아니라 부활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부활이 허위사실이고 조작된 것이라면 기독교의 시작이나 전파나 확장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허위사실에 자신의 목숨을 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부활이 허위사실이라면 기독교는 일어나다가 금방 사라졌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복음의 힘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사도들의 복음전파의 힘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의 목숨을 걸만한 힘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믿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의 힘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라는 선포는 초대교회의 복음전파의 내용이었고, 전파의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복음증거의 핵심이었고, 교회설립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복음도 교회도 전파도 순교도 다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면 그리스도로서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면 구원도 교회도 없습니다. 만일에 부활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다면 기독교는 현실적 도덕적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영생이 없고 하늘나라가 없는 기독교는 존재 자체를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만일 부활이 없다면”이라고 가정합니다. 19절에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합니다. “부활이 없다면”이라는 가정은 부활이 없을 수 없다는 부활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천사는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빈 무덤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의 부활의 결정적 증거가 바로 눈으로 확인하였다는 것입니다.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부활을 반대하는 설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허위설’이라고 하여 예수님이 부활하였다고 거짓말하고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설입니다. ‘무덤오인설’이라고 하여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이 아니라 다른 빈 무덤을 찾아갔다는 설입니다. ‘기절설’이라고 하여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는 설입니다. ‘환상설’이라고 하여 예수님을 너무 사모한 나머지 환상으로 부활하신 모습을 보았다는 설입니다. ‘신비설’이라고 하여 바빌론신화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만들어냈다는 설입니다. 이외에도 부활에 관한 설들이 많은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이 극렬하게 반대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증거입니다.
만일에 부활이 없으면 이렇게 설교할 것입니다. “여러분,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니니까 이 땅에서나 잘 삽시다”하면 여러분들은 “아멘” 하시겠습니까? 이래서야 믿음의 가치가 있으며 교회가 힘이 있겠습니까? 아니면 “죽음 이후는 잘 모르겠으니까 아무꺼나 믿으세요”하면 여러분들은 “할렐루야” 하시겠습니까? 부활이 없다면 결코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지금도 무덤에 계신다면 우리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아닙니다. 나아가서 우리의 부활도 없습니다. 빈 무덤은 우리의 생명이며 소망이며 장래의 부활입니다.
둘째,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습니다.
마태복음 28:6 상반절에는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말씀하시던 대로”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갑작스런 사건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언은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40에는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고 합니다. 구약의 인물들은 예수님의 모형이며, 구약의 모든 사건들은 예수님의 사건의 모형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깜짝 사건이 결코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과 신약에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을 믿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시지 않고 하신 일이 없으며, 하나님은 미리 예고도 없이 인간을 멸망하시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듣지 않아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누누이 말씀하신 대로 이룬 것입니다.
“말씀대로”라는 표현은 성경에 70여 번 나옵니다. ‘말씀대로’라는 의미로 말하자면 100번 이상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민수기 23:19에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신 모든 말씀을 이루실 수가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합니다. 누가복음 1:37에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실 것이라고 천사가 말하였습니다. 38절에는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고 합니다. 천사가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실 것이라고 할 때에 마리아는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의 몸을 통하여 낳게 하신다는데 ‘싫습니다’, ‘두렵습니다’ 하지 않고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씀대로’의 믿음은 정말 위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1에는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합니다. 죽은 후 제삼일의 부활은 이미 예고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부활도 믿어야 할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17:23에는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제삼일의 부활을 믿었습니까, 믿지 못했습니까? 분명히 믿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근심하더라’는 말은 믿었다는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지 못했으면 근심할 것이 아니라 ‘농담이죠?’라고 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0:19에는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고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내용을 순서까지 정확하게 이미 증언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넘겨주게 되고, 조롱하게 되고, 채찍질하게 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되고, 제삼일에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63에는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라고 합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한 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장본인인 그들도 이미 사흘 후에 부활하실 것을 듣고 알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3에는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대로” 된, “말씀대로” 된 일이었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부활이 말씀대로 된 사건이라는 것을 믿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국 LA 근교에 글렌데일에 가면 ‘포레스트 론’이라는 묘지가 있습니다. 그 곳에 가면 ‘십자가에 못박히심’(The Crucifixion)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폴란드 화가인 얀 스티카가 그린 그림인데 너비가 60미터이고 높이가 14미터나 되는 세계최대의 유화입니다. 이 그림을 둘 데가 없어 세관창고에 있던 것을 휴버트 이튼이란 ‘포레스트 론’ 설립자가 사서 그 그림에 맞춰서 집을 지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 그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 왼쪽 아래에는 바울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가장 큰 화젯거리였으니 바리새인이며, 율법 맹신주의자이고, 박해자인 바울이 보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근거에서 화가가 십자가 곁에 바울을 그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의 전 삶은 말씀대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말씀의 성취입니다. 마태복음 1:22에는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난도 말씀의 성취입니다. 마태복음 2:15에는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 일컫게 된 것도 말씀의 성취입니다. 마태복음 2:23에는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도 말씀의 성취입니다. 마태복음 21:4에는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말씀대로 이루어진 말씀의 성취입니다. 말씀을 믿는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부활의 소망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결론
모스크바에 가면 클레믈린 광장에 레닌의 무덤을 볼 수 있습니다. 베이징에 가면 마오쩌퉁의 무덤을 볼 수 있습니다. 호치민시티에 가면 호치민의 무덤을 볼 수 있습니다. 평양에 가면 금수산 태양궁전에 김일성, 김정일의 무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무덤에는 많은 사람이 참배하고 무덤의 규모도 대단합니다. 창세기 3:19에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죽었지만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육체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 원리에서 볼 때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19:25에는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사람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또한 구원받은 자들을 죽은 후에 주의 말씀대로 다시 살게 하여 영원히 사는 것도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말씀대로 사신 우리 주님처럼 우리도 말씀대로 다시 살아 하늘나라의 영원한 삶을 누리는 부활의 은혜가 충만한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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