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셰르파’라 불리는 히말라야의 등산 안내인이 있습니다. 본래 ‘셰르파’는 네팔의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남쪽의 쿰부 지방에 거주하는 티베트족 계열의 고산족의 명칭입니다. 고소작업에 빼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어 20세기에 들어와서 히말라야 등반대나 탐험대의 물자 운반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이 없이는 히말라야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하리만큼 이들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히말라야 고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8,000미터 이상 되는 고봉을 정복하고 하산하는 도중에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우리나라의 등반대장이었던 박영석대장도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후에 2011년 하산하는 길에 실종되었습니다. 히말라야의 길은 언제나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히말라야뿐이겠습니까? 아프리카나, 아마존이나 그 외의 산악이나 밀림지대에서 길의 안내자 없이는 가기 힘든 곳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길의 안내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들의 역할이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중동이나 양이 많은 지역이 가면 산등성이에 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까이에 가보면 양이 다니는 길입니다. 양은 가던 길만 가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에 그 길이 멀리서 보면 산에 줄을 그어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양은 안전한 곳만 다니므로 그 길을 알고 따르는 길입니다. 가지 않던 길은 가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양의 습관입니다. 목자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하지만 길 안내자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목자는 양에게 절대적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23:2-3에는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합니다. 양에게 가장 좋은 길은 푸른 풀밭이며, 쉴만한 물가입니다. 목자는 그 길을 알고 양을 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양이 바른 길, 가야 할 길을 가게 해야 합니다. 양인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아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길을 가장 잘 알까요? 길을 만든 분입니다. 성경은 “여호와의 길”이라고 하는데 여호와의 길은 여호와께서 가장 잘 아십니다. 그리고 길을 잘 아시는 분은 길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길을 가장 잘 아십니다.
요한복음 14:4에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4:5에는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라고 합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6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세계문화유산이라고 자랑하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 가면 곳곳에 뱀의 상이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뱀을 ‘나가’라고 합니다. 고대 크메르인들은 뱀을 신의 화살 혹은 무지개라고 생각했습니다. 뱀을 세상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도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앙코르톰 입구에 긴 다리가 있는데 다리 양쪽에는 54신이 뱀을 잡고 있습니다. 다리 양쪽의 신을 합하면 108 신이 있습니다. 108신은 불교적 영향이라고 합니다. 뱀이 땅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앞서 가시는 길의 인도자이십니다. 우리 앞서 먼저 가셔서 장막 칠 곳을 예비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먼저 가시고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홍수가 나고, 비가 세차게 내리고, 바람이 불어 가는 길이 막히고,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상의 재난 속에서도 막힌 길을 뚫어주시고, 끊어진 길을 이어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행실이 온전한 성도의 방패가 되십니다.
잠언 2:7에는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되,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십니다. 2:6에는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라고 합니다. “주시며”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이텐’인데 ‘배당하다’, ‘승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원하며 찾아야만 주겠다는 조건절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비 된 지혜이지만 우리가 추구하고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1:5에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지혜를 풍성히 주십니다. 그리고 성경은 “지혜를 얻으라”고 합니다. 지혜는 구하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든든한 방패가 되십니다. 히브리어로 ‘홀르케 톰’이라는 말인데 문자적으로는 ‘흠 없이 걷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말씀대로 사는 자를 일컫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사람에게 “방패가 되시나니”라고 합니다. “방패”는 ‘마겐’이란 히브리어인데 하나님의 신적 보호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완전한 안전을 상징화한 말입니다. 성경에는 곳곳에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심을 확인합니다.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시33:20),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시84:9),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시119:114)고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는 주변 강국인 애굽, 앗수르, 블레셋, 바벨론, 바사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약소국가였던 이스라엘은 그들을 막아낼 방패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방패’라고 하고, 방패가 되어주시기를 갈망했습니다.
방패는 적의 무구에 의한 공격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방어용구입니다. 방패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화살을 막는 대형 ‘치순’(置眉)이 있고, 둘째는 한 손에 들고 창검 등 무구와 병용하는 소형 ‘지순’(持盾)이 있습니다. 방패이신 하나님은 모든 침략과 공격을 확실하게 완전하게 다 막으시는 이스라엘의 든든한 방패가 되십니다.
이스라엘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힘이시며, 산성이시며, 방패시며, 요새시며, 구원의 뿔이십니다. 약소민족의 하나님은 힘이 있고 전쟁에 능하신 주님이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이 땅에서 생존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힘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려울 때 피할 길을 아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좇아가는 지혜를 허락하십니다.
소돔의 롯의 집에 주의 사자들이 들어왔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롯에게 “그 남자들을 내놓으라”고 하였지만 롯은 자신의 집에 온 손님들을 내 놓지 않았습니다. 소돔 남자들이 롯의 집에 들어왔다가 하나님께서 눈을 어둡게 하시므로 문고리를 찾지 못하고 허둥대게 하셨습니다. 출애굽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홍해가 가로놓여 있었고, 애굽의 군사들이 백성들 뒤에서 쫓아왔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밤새 불기둥으로 애굽의 군대를 막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까이에 오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가나안의 크고 견고한 성 여리고를 정복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팔을 불며 횃불을 들고 성을 돌았습니다. 마지막 날 그 성을 돌 때 성이 무너졌습니다. 견고한 성이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승리하게 하십니다. 반면에 여리고보다 작은 아이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기지 못하고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전리품을 훔친 아간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에 이기고 지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아람왕이 불 말과 불 병거를 앞세우고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엘리사가 하나님께 아람왕의 눈을 어둡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람왕의 눈을 어둡게 하셔서 아람왕의 침공을 막아 주셨습니다.
에스겔 21:20에는 “유대의 견고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주전 586년 남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할 때 예루살렘성전에서 제사 때에 사용하던 그릇까지 싹쓸이 하였습니다. 그후에 고레스 칙령으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장군에 의하여 다시 나라를 잃었습니다. 나라를 잃은지 1878년 만인 1948년에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건국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100여 개국에 유대인 ‘디아스포라’ 730만 명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패가 떠나면 패배하고 흩어지고 지배 당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행실이 온전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십니다. 행실이 온전치 못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방패가 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행실이 온전치 못하게 살면 방패 없이 여기저기 뚫리고 동네북처럼 얻어맞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사면초가’(四面楚歌)로 완전고립상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는 방어용 도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럽의 잘츠부르크, 함부르크, 스트라스부르 등 ‘부르크’(Burg)라는 이름은 ‘성’, ‘성곽’이라는 뜻입니다. 이 도시들은 원래 성곽도시로 건립되었습니다. 기원전 2000년경 황하유역의 성곽도시들은 ‘성’(城)자를 붙였습니다. 장안성, 낙양성, 개봉성 등이 성곽도시들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전 서울을 한성(漢城)이라 불렀고, 수원을 수원성(水原城)이라 했습니다. 외국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토를 방어할 목적으로 지은 도시들입니다. ‘방어용 도시’인 것입니다.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면 하나님이 방패가 되시는 것입니다.
‘날벼락’이란 말이 있습니다. 길을 지나가다가 간판이 떨어져 맞아 죽고, 갑자기 땅에 ‘싱크홀’이 생겨 땅속에 빠지고, 출동한 소방대원이 한눈을 판 트럭 운전자의 차량에 치어 죽고, 날벼락 같은 사건들, 상상할 수 없는 위험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셔야 이런 위험이 없이 든든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친히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시는 힘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성도의 길을 보호하시고 보전하십니다.
잠언 2:8에는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길을 보호하십니다. 성도의 길을 보전하십니다. 길의 주인이시고, 길을 아시는 주님은 친히 우리의 길을 보호하시고 우리의 길을 보전하십니다.
“보호하시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차르’라는 말인데 ‘지키다’, ‘준수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율법을 준수하다는 뜻을 가리키고, 사람이나 보호 대상을 지키고 ‘보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의의 길”이란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합당한 모든 길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길은 불의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고 의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도들의 길”이란 구원받은 거룩한 무리의 길입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가는 길이 성도의 길입니다.
우리의 길이 보호받을 수 있는 비결은 정의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길이 성도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정의의 길은 성도의 길입니다. 성도는 모름지기 정의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길은 모름지기 정의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옳은 길은 하나님이 보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라고 합니다.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사26:7)라고 합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12:23)이라고 합니다.
길을 제대로 가고, 바른 길을 간다는 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길을 잘못 들어섰다가 평생의 삶이 꼬이고 인생을 망친 사람이 허다합니다. 가야할 길을 알아야 하고, 그 길을 바르게 가는 것이 잘 사는 길입니다.
요즘에는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길을 정확하게 인도합니다. 처음 가는 길이라도 걱정할 것이 없이 잘 인도해주니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비게이션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내비게이션이 앞으로 더 나아갈 데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인도할 때도 있고, 가까운 길을 멀리 돌아가게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기계라는 것이 한계가 있고, 기계만 믿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내비게이션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따라간 아브라함은 틀림없는 길을 갔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로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길이 없는 광야지만 앞서 가시며 평안의 길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다윗은 하나님께 길을 물어보고 하나님은 길을 지시하셔서 뽕나무 수풀 뒤로 공격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가게 인도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빌립은 성령의 지시로 광야로 가서 간다게의 내시를 만나 아프리카 전도의 문을 열었습니다. 바울은 두 번째 전도여행 때에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영이 직접 막으셔서 그의 길을 드로아로 지시하셨고 그 길로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내비게이션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가는 길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바릅니다.
‘룻기’의 사랑 이야기를 보세요. 베들레헴 여인 나오미는 기근으로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으로 갔습니다. 모압에서 두 아들이 결혼하여 나오미는 오르바와 룻 두 며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이미 세상을 떠나보낸 나오미는 두 아들 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기근으로 고향을 떠나 모압으로 갔지만 기근보다 더 험악한 일을 만나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려 했습니다. 두 며느리가 함께 길을 나섰지만 오르바는 결국 모압에 머물게 되고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룻이 선택한 길은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길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 돌아온 룻은 시어머니를 위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의 눈에 들어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고,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아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계보에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보전하시는 길이었습니다. 룻이 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온 길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목자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양을 먹이는 일입니다. 양을 건강하게 관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양을 나쁜 짐승에게서나 어려움에서 보호하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목자의 역할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들이 해야 할 역할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목자의 보호본능을 발휘하십니다. 양인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하십니다. 넘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발을 무겁지 않고 가볍게 하셔서 사슴의 발 같게 하십니다. 다른 길로 가지 않게 하십니다. 먼 길을 가도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십니다. 곤비하거나 피곤하지 않게 하십니다. 발을 반석 위에 올려 두셔서 걸음을 견고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걸음을 다 세고 계십니다. 이만하면 안심하고 걸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땅이 꺼질까 염려하지 마세요. 갈팡질팡 하지 마세요. 한 걸음씩 힘차게 내딛고 걸어가세요.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얼마나 힘이 되고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찬송입니까? 발걸음이 무겁고 힘이 들 때마다 이 찬송을 하며, 혼자 다니지 말고 주님과 함께 다니는 주님의 자녀가 되세요.
시편 119:105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 우리 예수님은 우리 발의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십니다. 말씀이신 주님은 내 길을 비추어 바르게 가게 하십니다. 주의 말씀은 내가 가는 길을 확실하게 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는 현대의 유일한 계시입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우리 발의 등이 되고, 길에 빛이 되고, 전 삶의 여정의 내비게이션이 되게 하세요. 말씀이신 그리스도,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좇아가고, 함께 가고, 의지하고 가면 안전하고 모든 일이 형통하고 평안할 것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빨리 가려면 함께 가고 멀리 갈 때도 함께 가라.” 단 주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어디든 혼자 다니지 말고 주님과 함께 다니세요. 우리의 발걸음은 참 서툽니다. 나이 들고 경륜이 생기면 익숙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나이 들어도 여전히 서툴고 더 잘 넘어집니다. 주님과 함께 가야 주님이 그 길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보전하실 것입니다.
결론
미국의 변호사인 호레이스 스페포드는 1871년 시카고대화재 때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2년 뒤 그의 아내 애너가 네 딸과 함께 영국에 가다가 여객선이 침몰하여 네 딸이 다 죽었습니다. 아내는 혼자 물 위를 떠돌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구조되어 영국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아내의 전보에는 두 단어만 적혀 있었습니다. “혼자 구조됐음.” 그가 아내를 데리러 영국에 가는 배에서 찬송을 지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동행하는 자는 재산의 손해나 심지어 가족의 죽음에도 “내 가는 길 순탄해”, “내 마음 평안해”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잠언 2:20에는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 지혜는 우리를 선한 길로 행하게 하고, 의인의 길을 지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완전한 지혜를 가지고 평생의 길이 선한 길, 의인이 길이 되어 실족함이 없이 인생길을 편안히 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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