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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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성희 담임목사
설교일 2018.6.10
설교본문 사무엘상 24:11-13 / 마태복음 12:35-37

서론

소설가 박지리씨의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가족이란 테두리에서 3대에 걸친 악의 굴레를 글로 풀고 있습니다. 살인을 싫어하지만 살인하게 되는 가혹한 운명을 또한 그리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인간의 악의 본질을 투여한 작품이라고 평가합니다. ‘인간은 악한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끊임없이 ‘그렇다’라고 설명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은 선한 것의 결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죄란 하나님이 주신 선을 버리고 악을 취하므로 생긴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셔서 선하게 만드셨는데 악한 존재가 인간을 악하게 타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악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이사야 14:12에는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라고 합니다. 계명성은 흔히 마귀라고 하는 ‘루시퍼’를 지칭합니다. 계명성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려고 했던 타락한 천사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8:44에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란 말은 창조의 처음이 아니라 처음 죄를 지었을 때부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을 악하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악한 존재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악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인간이 선택하므로 죄를 짓게 되고 아담이 지은 죄로 모든 인간이 원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인간에게 악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위대한 신학자 토머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의지는 선한 것을 추구하지만 악이나 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포함하고 있는 행위의 감각적인 쾌락을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를 일을 선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선은 악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악은 마치 기생충처럼 먹이가 될 선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수없이 선을 얘기하지만 악의 진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릅니다. 보이스피싱 같은 경우에는 우리나라에서만 하루에 672건 정도 발생합니다. 하루에 보이스피싱으로 인한 손실액이 7억 원이라고 합니다. 그 수법도 점점 고도화되어 정신을 바짝 차려도 속아 넘어가기 일수입니다. 마약밀수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진보하고 있고, 가족 살인도 점점 더 끔찍해지고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든 악당들 중에 종교적 악당이 최악입니다. 종교적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인간은 가장 철저하게 악을 저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역사에서 종교전쟁을 보세요.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하고 길게 지속되는지 모릅니다. 최근의 ‘신천지’ 이단의 활동을 보세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성교회를 공격하고 문제를 일으켜 예배당을 자기들이 접수합니다.
악행은 하나님께서 철저히 금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살도록 창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율법에 “이런 자는 죽이라”고 하신 법들이 있습니다. 이런 법들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금지하신다는 뜻을 강하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마치 사형제도가 있으면 범죄율이 낮아지는 것과 같은 효과입니다.
다윗은 사울로 말미암아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 수 없이 피난가고 이리저리 도망가야 했습니다. 다윗의 군대와 사울의 군대가 전쟁도 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공격을 피하여 도망 다니는 동안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사람을 내가 판단하지 않겠다”는 선한 마음으로 사울을 선대하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선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이런 다윗의 마음을 닮은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악인에 대한 보복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사무엘상 24:12에는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원수 갚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하였습니다. 원수를 갚는 일은 내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가 있습니다. 나도 얼마든지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판단하거나, 보복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일입니다. 로마서 8:33-34에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4:5에는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로마서 12:19에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합니다. 정죄, 판단, 보복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고 성경이 여러 번 가르칩니다. 악인에 대한 보복이나 원수 갚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형들이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을 형들이 전하면서 요셉에게 형들에게 보복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형님 당신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인 심판은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형들을 이미 그리고 완전히 용서하였습니다. 대단한 사랑이며 용서입니다.
히브리서 10:30에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원수는 내가 갚을게, 너희들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여라.”
다윗은 사울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심판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역대상 10:14에는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직접 죽이셨다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왕위를 찬탈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죽이고 왕위를 다윗에게 직접 주셨습니다.
원수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기도해야 할 대상입니다. 원수든 우리를 박해하는 자이든 우리가 미워하고 정죄할 대상이 아닌 것을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시고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원수를 위하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셔서 원수에 대한 용서를 말씀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신약 최초의 순교사인 스데반은 돌아 맞아 순교하기 전 최후의 진술에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처럼 용서의 본을 보이고 성경은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합니다. 용서의 청원이 최후의 진술이었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손양원목사님을 보세요. 여순반란사건에서 목사님은 아들 동인과 동신을 잃었습니다. 안재선이란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학생이 두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 때 손양원목사님은 안재선을 용서하셨습니다. 용서할 뿐만 아니라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안재선은 손재선으로 성씨 개명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은 안재선에게 철저하게 대신 보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복하셨는지 아십니까?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셨고, 후에 안재선의 아들이 목사가 되게 보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실로 놀랍습니다.
제주도의 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5살 된 아들의 어머니가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아들은 의원을 찾아가서 어머니가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의원은 어머니의 병은 어떤 약도 고치지 못하고 밤에 불이 훤한 곳을 혼자 가서 약을 구해 와서 먹여야 낫는다고 했습니다. 의원은 꼭 밤에 가야 한다고 당부하며, 아직도 그 약을 구하러 가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절대 아들이 가면 안 된다고 했지만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서 가겠다고 하면서 밤이 되자 불빛이 훤한 곳을 향해서 갔습니다. 가는 도중 불이 훤한 곳에 가서 괴물 같은 구렁이를 만났습니다. 아들은 용기를 내어 구렁이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하였더니 구렁이는 “나는 천년 묵은 구렁이다. 너는 누구냐?”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은 “나는 만년 묵은 여우다”라고 큰 소리로 답을 했습니다. 구렁이는 “아이구 형님” 하고는 물러섰습니다. 아들은 구렁이에게 “너는 무엇이 제일 싫으냐?” 했더니 담뱃진이 제일 싫다고 했습니다. 구렁이는 아들에게 “형님을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싫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가난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하고 어머니가 아파도 약을 쓸 수가 없으니 돈이 제일 싫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구렁이에게 약을 구해 와서 어머니가 먹고 거뜬하게 나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담뱃진을 모아 구렁이에게 가서 죽이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물을 물리쳤습니다. 어느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는 밤에 구렁이가 원수를 갚으려고 나타났습니다. “나도 형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을 가지고 왔소” 하였습니다. 얼마나 무거웠든지 지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구렁이는 아들이 제일 싫어하는 돈을 보따리채 가지고 와서 아들은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원수 갚는다는 게 부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이지만 선으로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보복이나,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내가 하는 것을 하나님은 절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할 일을 이미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다윗에게 배울 점도 바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입니다.

둘째, 선한 사람은 악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24:13에는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악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나는 악인이 아닙니다”라는 자기고백입니다.
다윗은 왕위에 대한 야욕도, 사울을 해할 악의도 없었습니다. 만일 다윗에게 이런 욕망이 있었으면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또 당시에 인간적인 욕망으로 보면 사울을 죽였다고 해도 얼마든지 정당방위였고 명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잘라서 그런 야욕도 악의도 없음을 입증하였습니다. 나아가서 자신은 악인이 아닌 선인이라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착한 성품대로 사울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말했습니까? 다윗은 악인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속담’이란 잠언 혹은 격언을 말합니다.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을 담은 구전들이 속담이나 격언으로 많이 남아 있습니다. 속담은 율법에 근거한 유대인들의 선조들의 삶에서 나온 금언들을 모은 것입니다.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는 말은 악한 마음의 소유자만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속에 악이 없는 사람은 악한 행동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악한 마음이 없는 사람이 악한 일을 할 리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7:17에는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라고 합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자연의 법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사람이 악을 행합니다.
마태복음 12:35에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합니다. 악한 사람은 자신 속에 악을 쌓은 사람입니다. 야고보서 3:12에는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선한 사람은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악한 일을 연구하고 꾸밉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점점 악이 진보합니다. 사람을 교묘히 속이고 고통을 줍니다. 만일에 사람이 마귀의 편이 되면 마귀가 악한 생각을 도와줍니다. 마귀만큼 악한 생각이 많은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마귀는 온통 악한 생각뿐이기 때문에 마귀의 편이 되면 마귀는 좋아하고 더 악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악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악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악한 사람은 자신의 결함을 인정할 수 없기에 다른 사람을 비난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결함을 피해 갑니다. 심지어 정의라는 말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적대시하고, 파괴합니다.
디모데후서 3:13에는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라고 합니다. 속이는 자들이 속이기만 합니까? 속기도 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속인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속은 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속았다고 분통을 터트립니다. 예수님 당시에 헤롯왕이 그랬습니다. 헤롯왕은 박사들을 속이고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을 알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했지만 박사들은 꿈에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자신이 박사들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고 분히 여겼습니다. 박사들이 헤롯을 속인 것이 아니라 헤롯에게 박사들이 속지 않은 것뿐입니다.
선악의 보편적 기준과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들은 그 기준을 넘어섭니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보편적 기준을 넘어서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의 악인은 다른 사람의 악만 보고 자기를 기만합니다.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하는데 뭘” 하면서 자기의 악을 정당화합니다. 다른 한 부류의 악인은 극단적인 종교적 신념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알 카에다’나 ‘이슬람국가’(IS) 그리고 나아가서 극단적 ‘기독교 우파 게릴라’ 등이 이런 부류입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악을 마구 저지르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1에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시편 1편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의인들은 악인들의 꾀를 좇지 않습니다. 악인들과 같이 악을 행하지 못합니다.
2절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의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사람이 어떻게 악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말씀대로 사는 자이기에 악을 행할 수 없습니다.
오래 전에 조지 W 부시 전 미국대통령이 이라크, 이란, 북한 등을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나라들이 이 말에 크게 반발하였지만 미국의 의도는 이들 나라들로부터 악이 시작된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알고 보면 ‘악의 축’은 마귀의 손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선의 축’일 수는 없습니다. ‘선의 축’은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잠언 21:10에는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하나니 그 이웃도 그 앞에서 은혜를 입지 못하느니라”라고 합니다. 악인은 악을 조장합니다. 남에게 재앙을 내리게 하고 남의 재앙을 기뻐합니다.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남이 안 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것보다 더 좋아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체가 악한 일입니다.
로마서 12:17에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합니다. 성경이 뜻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으려고 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선을 도모하라는 말입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행하지 않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에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맙시다. 모두를 향해 사랑의 마음을 품읍시다.” 그 마음에 악의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잡은 선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결론

인도네시아 발리의 사원이나 전통 가옥에는 문이 아주 작습니다. 왜 이렇게 문이 작으냐고 물어보니 악한 귀신, 악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문을 작게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을 작게 만들어놓으니 악한 것뿐만 아니라 좋은 것도 못 들어오게 생겼습니다. 성경에는 악한 귀신은 못 들어오게 하든지 너무 깨끗하면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오는데 문을 작게 만들어놓으니 더 귀신이 많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악을 못 들어오게 할 것이 아니라 선이 들어오게 적극적으로 초청하는 것이 훨씬 낫고 잘 살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4:7에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합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죄를 다스리라고 합니다. 죄는 다스리고, 선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 가운데 살지 않고 악하게 살지 않게 됩니다.
제가 박사과정을 공부할 때 도디 도널리라는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분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공부 시작 전에 항상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감고 호흡을 하였습니다. 호흡할 때 숨을 뱉을 때 내 속에서 나가야 할 것들을 묵상하며 악한 것들을 내뱉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숨을 들이킬 때에 내 속에 들어와야 할 것들을 묵상하며 선을 초청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 때 배운 대로 크게 숨을 쉬면서 ‘악한 것 나가라’, ‘선한 것 들어오라’고 묵상하며 호흡합니다. 악의 문을 닫고, 선의 문을 활짝 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악인에 대한 보복, 마음의 억울함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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