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얼굴을 숨기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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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성희 담임목사
설교일 2018.7.15
설교본문 신명기 31:17-18 / 데살로니가후서 1:7-9

서론

성자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상상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원한다면 이렇게 해 보는 것이 어떠냐?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다. 능력이나, 명예나, 부나, 자유나, 심지어 마음의 평강이나, 선한 양심, 그 어떤 거라도 좋다. 네게 불가능한 것이 없고, 죄가 될 것이 없으며, 금지된 것이 없다. 너는 죽지 않고 고통을 받지 않을 것이다. 단 한 가지만 빼고. 그 대신 너는 나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최상의 삶 같아 보이지만 최악의 삶입니다.
인간이 온 천하를 다 가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봐야 영원한 복락입니다.
영화감독인 우디 앨런은 “인생의 90%는 얼굴 도장을 찍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인생의 100%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라고 해야 옳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살아야 진정한 삶입니다. 신앙적 의미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얼굴’이란 말의 어원은 ‘얼’ 즉 정신적인 것이 담긴 ‘꼴’ 즉 모양새를 말합니다. 얼굴이란 바로 ‘정신적 모양새’를 뜻합니다. 얼굴은 내 자신의 모양새입니다. 아무개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그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얼굴이 그 사람 자신의 모양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 당신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을 알듯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는 하나님의 얼굴로 표현됩니다.
성경에는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한 그 곳이 브니엘입니다. 창세기 32:30에는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고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았으므로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여 기념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3:20에는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합니다. 23절에는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였을 때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므로 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얼굴을 잠시도 돌리지 않으시고 항상 우리를 향하셔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흔히 아무도 모르게 기부나 선행을 하는 사람을 ‘얼굴 없는 천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모르게 우리에게 선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므로 ‘얼굴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이셔야 우리가 희망이 있고, 우리가 은혜를 누리고, 우리가 복을 받고,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욥기 34:29에는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시고 얼굴을 돌리신다면 우리는 절망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선하신 얼굴을 우리도 마주 보며 하나님의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은총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신 것은 버리셨다는 증거입니다.

신명기 31:17 상반절에는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우리를 버리시면 얼굴을 숨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버리시면 하나님의 사람일지라도 다시는 보시지 않습니다.
“진노하여”라는 말은 “하라”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빨갛게 되다’, ‘더워지다’라는 뜻입니다. 얼굴이 빨갛게 되고, 마음속에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화가 날 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빗대어 하나님의 진노를 묘사한 것입니다.
진노란 열이 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우리는 ‘열 받는다’라고 표현하는데 바로 진노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화가 나다’라고 할 때에 화(火)는 곧 불입니다. 진노하는 것은 마음에 불이 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진노하게 되면 실제로 육체도 열이 올라가고 얼굴이 붉어지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고 화가 난 가인의 얼굴은 안색이 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화가 나면 열이 오르고 안색이 변하는 법입니다.
우리말에 ‘안면몰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모른 체 하거나 뻔뻔하게 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얼굴을 없애는 것입니다. 얼굴을 숨기고 얼굴이 없는 듯이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외면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외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얼굴을 숨겨”라고 합니다. 우리교회와 사회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교회가 성장에 매달려 사회를 향한 얼굴을 돌린 결과 이제는 사회가 교회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있습니다. 사회가 교회를 외면하고, 심지어 교회를 비판하게 된 것입니다. 알고 보면 버림 받은 쪽의 잘못도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부모는 아이를 골려주려고 숨어 있어 아이가 부모를 찾다가 우는 것을 보고 재미있다고 웃으면서 안아줍니다. 참 나쁜 부모입니다. 그게 재미있어서도 안 되고 아이의 기억 속에 버림을 받았다는 유기감이 오래 갈 수 있다는 것을 부모는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정신없이 열심히 놀다가 둘러보아도 부모의 얼굴이 안 보이면 아무리 재미있는 것이 있고, 좋은 것을 준다고 하더라도 부모를 찾을 때까지 울고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부모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고 자유함입니다.
랍비 바룩의 손자 여히엘이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히엘은 꼭꼭 숨어서 술래가 찾아와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20분이 지나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여히엘은 처음부터 그들이 자기를 찾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배신감에 울면서 할아버지께 달려와 불평을 하였습니다. 바룩은 눈물을 주루룩 흘리면서 하나님께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실 다음과 같이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숨어 있는데 아무도 나를 찾으려 하지 않는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자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시고 진노하십니다. 하나님도 그들을 버리고 얼굴을 숨겨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버림받고 얼굴을 돌리셨다는 것은 얼굴을 돌리게 한 사람들 편의 잘못이 큽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자기들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돌리게 만들고, 하나님 없이 더 큰 죄로 말미암는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얼굴을 숨겨”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외면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일을 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여도 못 본 척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아무도 우리를 바라보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는다면 그 고통은 배가 될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에 얼굴을 보여준다는 것은 어려움을 당한 자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고통을 당한 가정이나 초상집에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어떤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9:1-2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재앙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신 이유가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토미 테니는 ‘하나님께 굶주린 예배자’라는 그의 책에서 “우리는 은사가 아니라 은사 주시는 분을 갈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갈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잃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절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영국의 아동정신분석학자 볼비는 ‘애착이론’을 만들었습니다. 아이가 미소를 지으며 부모의 얼굴을 바라봄으로써 부모와 아이 사이에 애정이 형성된다고 그는 분석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봄으로써 사랑이 형성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사랑이 형성되지 않고 사랑이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시편 24:6에는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까?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입니다. 거룩한 곳에 설 자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는다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아닙니다. 거룩한 곳에 설 자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절대로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시면 우리는 한시도 살 수가 없습니다. 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다른 신을 따르는 악행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십니다.

신명기 31:18에는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반드시 얼굴을 숨기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다른 신을 따르는 악행을 행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최고의 악행이 무엇입니까? 다른 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우상숭배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란 어떤 행위가 아니라 행위 이전에 하나님과 분리된 삶입니다. 하나님과 결별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보지 않고 살겠다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도 믿음의 행위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도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다른 무엇인가를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따르는 악행을 행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얼굴을 숨기십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은 보기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으므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다른 신을 섬기는 자를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5살짜리 철수가 엄마와 함께 지하철을 탔습니다. 철수가 많은 사람들이 있는 지하철에서 너무 떠들어 엄마는 “철수야, 엄마가 어떤 사람이 제일 싫어한다 했지?”라고 했더니 철수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빠!”라고 소리 질렀답니다. 아마 철수 아빠가 평소에 철수 엄마를 사랑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랑했으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자는 곰곰이 생각할 것도 없이 다른 신을 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그 일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하나님은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른 신을 두어 하나님을 화나게 하였다고 하십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자를 죽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시는가를 단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꼭 우상을 만들고,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에게 무엇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대신 하는 것들을 섬기는 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기 이전에 모세를 하나님보다 더 섬겼습니다. 이렇게 우상이란 우리 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금송아지는 결코 나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금송아지는 내 곁에서 잠자고 나의 일터에서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란 유일하신 하나님을 제쳐두고 사람이나, 사물이나 육체적, 정서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자원공급을 찾는 그릇된 관습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신하는 무엇인가를 믿게 됩니다.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3:5에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합니다. 돈이나, 과학이나, 권력이나 또는 지적우상을 사람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념이라는 ‘이데올로기’ 등도 지나치게 탐하면 우상숭배가 될 수밖에 없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상숭배는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삼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좋은 것이라고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궁극적인 것은 목숨을 걸만한 것을 말하며 세상에서 우리의 목숨을 걸만큼 중요하고 좋은 것은 없습니다.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과 그 나라밖에 없습니다.
무신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세상에는 실체보다 우상이 더 많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만든 온갖 우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상들은 실체가 아닌 가상적이며 허무한 존재인 것들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인은 하나님 외에 온갖 다른 신을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들을 섬기다 보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악행을 행합니다. 하나님이 금하시는 가장 악한 행위를 서슴치 않고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정직한 왕들을 보세요. 한 결 같이 이들은 우상을 제거하고, 우상을 섬기는 제단을 헐었습니다. 반면에 악한 왕들을 보세요. 이방신들을 가지고 와서 우상을 섬기고 이방신을 위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왜 그들을 악한 왕이라고 합니까? 그들의 악행 때문입니다. 악행이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악행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은 이와 더불어 온갖 포악한 행실을 마다하지 않고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반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만든 신은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지켜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내가 만든 신 때문에 내가 어려워지고 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내가 만든 신이 나를 배반할 뿐만 아니라 내가 다른 신을 만드는 순간 하나님이 내게서 반드시 얼굴을 돌리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 내리시는 벌이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후서 1:9에는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장차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지옥에 떨어져 멸망의 벌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 가면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라고 노래합니다.
요나 1:3에는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라고 합니다. 인간의 죄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은 것과 똑 같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서 얼굴을 가리시고 얼굴을 돌리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살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면 그 자체가 파멸인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긴 결과가 17절 하반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면 재앙이며 환난입니다. 우리 개인이나 지구촌의 재난은 알고보면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고, 돌리신 결과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보고 있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합니다. 희미하고 불확실한 신앙에서 확실한 신앙으로 진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여 본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여 보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에는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주님의 얼굴을 항상 대면하고 살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인데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랑하는 주님의 얼굴을 뵙는 것은 얼마나 더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정말 주님의 얼굴을 뵐 때에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의 얼굴을 뵐 그 좋은 날을 기다리며, 그날에 주님의 얼굴을 떳떳이 뵐 것을 기대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악행을 버리고, 선행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고,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늘 기쁘고 즐겁게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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