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숨어계시는 하나님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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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성희 담임목사
설교일 2018.7.22
설교본문 이사야 45:14-17 / 요한복음 14:8-9

서론

하나님께 대한 학문인 신학의 제일 명제는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finitum non possit capere infinitum)”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revelatio)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계시해주지 않으시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말할 때 신학적으로는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눕니다. 자연계시란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고, 특별계시란 하나님의 말씀만을 통하여 알 수 있게 하셨다는 이론입니다. 오랜 기독교의 신학적 전통 가운데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Agnisticism)이란 이론이 있습니다. 1869년 헉슬리가 주장한 이론인데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 하지 않는지, 증명할 수 있는지 증명할 수 없는지 모르며 아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이론입니다. 초경험적인 존재와 본질에 대하여 인간은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신의 본체는 인간이 알 수 없다는 중세 신학사상에서 비롯된 근대사상이기도 합니다.
‘그노시스파’라는 신학의 한 파가 있었습니다. ‘그노시스’란 헬라어로 ‘지식’이란 말인데 인간의 지적 직관인 ‘그노시스’에 의해 신의 본체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불가지론’은 인간의 ‘그노시스’를 부정하고 더구나 신을 알 수 있는 지식이 인간에게는 전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다고 하여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볼 수 없다고 하나님이 계시기 않는다거나 숨어 계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숨어 계시다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표현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하나님 보기를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 하나님은 숨어계십니다. 그 후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고, 들을 귀가 있는 자만 하나님은 숨어 계시지 않고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20에는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죄인인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본체적 속성인 거룩하신 영광의 빛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보지 말라고 하신 것이지 숨어 계시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6:16에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해서 하나님이 숨어 계시다거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내가 눈을 감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색안경을 끼면 모든 것이 그 색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숨어 계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해서 계시지 않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지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시편 42:3에는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눈에 보인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를 의심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다석 유영모선생은 하나님을 “없이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독특하게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없는 듯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을 잘 알고, 하나님을 바로 알고 제대로 믿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현재는 숨어계시지만 장차 이방인들까지도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45:14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소득과 구스가 무역한 것과 스바의 장대한 남자들이 네게로 건너와서 네게 속할 것이요 그들이 너를 따를 것이라 사슬에 매여 건너와서 네게 굴복하고 간구하기를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하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주변강대국인 애굽, 구스, 스바 등이 바사 제국에게 무릎을 꿇을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장차 이방인들까지도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올 것을 암시하는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고 숨어계시고 침묵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힘이 드러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적 개념에서 이방인은 이교도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므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던 이런 이방인들까지 하나님을 찾을 날이 온다고 예언합니다. 영원히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 같았던 이방인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뜻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구세주가 아닌 온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오셔서 숨어계시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복음이 감추어지지 않고 모든 나라에 전파될 것을 기대하십니다. 마가복음 13:10에는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마가복음 16:15에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합니다. 주님의 뜻은 숨겨질 것이 아니라 온 천하에 드러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복음이 모든 백성에게 알려지게 하라고 하십니다.
흔히 종말이라고 하는 말세가 언제일까요? 예수님이 다시 세상에 오실 재림의 때가 언제일까요? 성경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때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4:14에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합니다.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면 세상의 종말이 올 것입니다.
복음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부터 서쪽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에 무시아에서 동쪽인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이 직접 막으셔서 서쪽인 드로아로 가게 하셨습니다. 서쪽으로 진행하던 복음이 지구를 한바퀴 돌아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유대인들이 회개하면 세상의 끝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전도하는 ‘Jews for Christ’라는 단체도 활발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는 ‘Back to Jerusalem’ 운동도 활발합니다. 실제로 무슬림들의 기독교로의 개종이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이 서구 세계에서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 개발도상 국가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가장 활발하게 기독교가 전파되고 있는 곳이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인데 이 지역에서는 열정과 은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고든 콘웰신학대학교의 국제신앙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빨리 기독교가 성장하는 나라가 네팔, 중국, 아랍에미레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오만, 예멘, 몽골, 캄보디아, 바레인 등입니다. 이 나라들은 전통적인 이슬람국가들과 불교국가들입니다. 이런 타종교를 가진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숨겨지지 않고 활발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예배하는 기독교인의 수는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들인 유럽 전체보다 중국이 더 많습니다. 중국은 지금 매주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기독교인의 수가 늘어나고 있고 더 이상 복음을 감추지 못하고 지상에서 그리고 지하에서 전파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멀리 다른 나라들을 볼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쇠퇴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기독교가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쇠퇴하는 현상입니다. 타종교도 종교인의 수 그리고 성직자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 비해 볼 때에 기독교는 오히려 교인이나 성직자의 수적 감소가 적은 편입니다. 이런 현상은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인구는 967만6천명으로 기독교가 한국 제일의 종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결코 감추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고 전파되고 있습니다.
시부야 쇼조의 ‘유쾌한 상사 능력 있는 리더’라는 책에 보면 재미있는 관찰이 많이 있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는 것은 자신을 숨기지 않고 작전이나 본심을 드러낸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손바닥은 인간의 심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부위입니다. 마치 손바닥은 마음속과 같습니다. 손바닥을 보인다는 것은 마음을 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손금을 봐주는 사람에게 손바닥을 내밀고 있으면 인간은 정직해집니다. 손금을 보는 사람이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게끔 되는 것은 이런 까닭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이란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손을 펴십니다. 하나님이 손을 펴시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펴시면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펴시면 원수들은 멸망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숨어계시지 않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손을 펴십니다. 장차 하나님을 모르고 거부하던 이방인까지 숨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복음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을 지배하게 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숨어계셔서 우상 숭배자를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45:15에는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당신은 스스로를 숨기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숨어 계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은 결코 숨거나 쉬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결정적 순간에 하나님의 백성을 구해주시는 것을 확신하는 역설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 말 없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악에 대하여도 손 하나 대지 않고 내버려두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거만을 떨고,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지만 모른 척하고 가만히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같지만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은 활동하시고, 우주를 운행하시고, 죽을 자를 구원하시고,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시면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가 운행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5:17에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엿새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쉬지 않으시고 일하시고, 창조질서대로 만드신 만물을 운행하고 계십니다.
시편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네 가지로 표현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은 숨어 계신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하나님은 우리를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이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이 왜 숨어계십니까? 어리석은 자들에게,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쉽게 찾지 못하게 하시려고 숨어계십니다.
마태복음 7:6에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합니다. 거룩하지 못한 우상숭배자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개같이 살게 버려두시려고, 돼지같이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숨어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세요.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신 다음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값진 예수님의 기적을 천하게 여기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려고 비유로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저의 선친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내가 천당 갔다 왔다”고 여러 번 말씀하시면서 저에게 “내가 죽기 전에 얘기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값진 천국을 값싸게 하거나 듣는 사람이 오해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조롱은 구약에 여러 번 반복되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상하고 눈물로 탄식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여주시거나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숨어계십니다. 결국 이런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탄식하게 하시고, 영원히 보지 못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불결한 자에게는 숨어계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오직 마음이 청결한 자들만이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할 것입니다. 마음이 불결하면서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할 리가 없습니다. 마음이 불결한 자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볼까봐 두려워 할 것입니다. 마음이 불결한 자들은 우상숭배자이고 불신자일 텐데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며 없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불결한 자들에게 하나님도 얼굴을 숨기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예수님께 “내 아버지를 보여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고 숨어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우상숭배자의 눈에는 숨어계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라고 묻는 것은 물고기가 ‘물이 어디 있지?’라고 묻는 것과 같고 새가 ‘공기가 어디 있지?’라고 묻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구름이 해를 가렸다고 해가 없다고 하는 것이나 달이 산 너머 있다고 달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와 같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잠시 숨어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을 때도 해와 달은 있고, 깜깜한 밤에도 해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시편 42:3에는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고 합니다. 왜 눈물이 음식이 되었습니까? 단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조롱한다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지 못한 영혼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숨은그림찾기’를 보세요. 어떤 사람은 숨은 그림을 잘 찾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숨은 그림이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숨은 그림을 찾는 요령을 알면 숨은 그림은 더 이상 숨은 그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령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은 더 이상 숨어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는 신령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8:59에는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돌려 치려는 자들에게서 숨어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없다 하는 자들에게 숨어계십니다.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숨어계십니다.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자신이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 자리를 펼지라도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고, 바다 끝에 거주할지라도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볼 줄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숨어계시다고 하고, 보이지 않는다고 하고, 없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찾은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며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로 인정하고 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결론

인도의 오랜 전통 가운데는 자녀가 큰 잘못을 범했을 때 하는 아주 특별한 체벌이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른 아들을 데리고 숲속으로 가서 큰 나무에 아들을 묶은 채로 밤새 숲속에서 자신을 돌이키며 뉘우치게 하는 것입니다. 밤이 되면 멀리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로 아들은 공포심에 휩싸이지만 아들은 끝까지 참아야 하고, 긴 밤을 새우면서 큰 깨달음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나무에 묶어놓고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도 밤새 뜬눈으로 활이나 칼을 들고 숨어서 아들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훈계방법입니다. 아들이 벌을 받고 있지만 아버지도 함께 벌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숨어 있는 것이지 돌아가고 없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시편 27:9에는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라고 합니다. 시편 69:17. 시편 102:2, 시편 143:7에 네 번이나 반복해서 “주의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라고 간절하게 시편의 기자는 탄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얼굴을 숨기십니까? 노하실 때 숨기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절대로 하나님을 노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계시지 않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등 뒤에 숨어 계시지만 우리가 돌아보면 여전히 계시고, 우리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끈 모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믿고 참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참고 믿으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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