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모델링’이란 말은 심리학자 밴듀라가 처음 사용한 용어입니다.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하여 스스로 변해가는 것’을 모델링이라 합니다. 누구를 모델링의 대상으로 삼느냐 하는 것은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 효과가 있습니다. 모델링은 세 가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관찰과 학습의 효과입니다. 둘째는 어떤 행동을 억제하는 억제 효과와 억제되어 있던 행동을 다시 활성화하는 탈억제효과가 있습니다. 셋째는 동일시(identification) 효과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모델로 삼고 살면 그 사람과 내가 동일시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놀다보면 금방 닮아갑니다. 서로가 서로의 ‘역할모델’(role model)이 된다는 말입니다. 서로 함께 하다보면 말하는 것이나, 먹는 것이나, 일이나 사고하는 스타일이 비슷해지는 것은 서로가 ‘역할모델’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를 연구하는 동안 종종 친구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물리학, 철학, 문학 등 다양한 방면의 주제를 던져놓고 토론하였다고 합니다. 세계최고의 물리학자도 존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룹을 지어서 그들을 ‘역할모델’로 활용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닮을 줄 알고, 본받을 줄 아는 넓은 마음이 위인의 아량입니다.
사람들은 함께 살다보면 저절로 닮아갑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자녀들은 자기도 모르게 부모를 닮아가고 생긴 모습뿐만 아니라 행동과 삶이 ‘붕어빵’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존경하는 선생님을 제자들은 닮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부부가 닮아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회적 적응’이란 사회학적인 용어가 있습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본받아 닮아가려고 하는 본능입니다. 저도 평안도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 교회를 섬길 때 저도 모르게 평안도 사투리를 많이 쓰게 되었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 ‘부전자전’(父傳子傳), ‘유유상종’(類類相從), ‘초록동색’(草綠同色) 같은 용어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부나 부모와 자녀나 같은 유의 사람들이나 누구나 함께 있으면 본받아 닮게 되는 것이 자연적인 인간관계의 이치입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장교들은 ‘돌격 앞으로’라는 말을 절대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대신 ‘나를 따르라’라고 한다고 합니다. 부하들을 앞서 보내고 지휘관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휘관이 앞서고 부하들을 뒤에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부하가 지휘관을 따를 때, 부하직원이 상사를 따를 때 몸만 따른다면 한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따라야 온전히 따를 수가 있습니다. 윗사람이 본이 되고 모델이 돼야 아랫사람이 기쁘게 따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멘토’의 자격이 있습니다. 멘토는 멘토리에게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멘토는 멘토리와 깊은 유대관계가 있는 사람입니다. 멘토는 교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멘토는 멘토리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멘토는 멘토리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본받다’라는 말의 헬라어 단어 ‘미메타이’(mimetai)는 ‘모방하다’ 혹은 ‘그림자’라는 뜻입니다. 모방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행한 것을 보고 조금도 더함이나 덜함이 없이 그대로 따라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방이란 창조의 앞걸음입니다. 어떤 이를 모방하고 본받다 보면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지게 되는 법입니다.
요즘 ‘짝퉁’하면 중국을 떠올립니다. 중국은 정말 짝퉁의 천국입니다. 명품이라고 말하는 의류, 시계, 가방, 신발뿐만 아니라 심지어 계란도 짝퉁이 있다고 합니다. 짝퉁을 보면 진품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고 기술력도 대단한 것을 발견합니다. 짝퉁천국이라고 중국을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한 때 그랬습니다. 어떤 제품을 모방하여 짝퉁을 만들다 보면 기술력이 발달하여 진품을 능가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모방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이십니다. 바울은 오늘의 성경본문에서 먼저 그리스도가 자신의 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으로 삼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본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5:3에는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합니다. 베드로도 교회의 일꾼들에게 성도들의 본이 되라고 권합니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이 되고 그리스도의 본을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됩시다.
고린도전서 11:1 상반절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평생 그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애쓴 사람입니다.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그의 생각과 삶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의 전 생의 삶은 그리스도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소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지식을 버렸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 때문에 자신의 삶도 다 버렸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를 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신앙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기를 좋아하지만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신앙이 약한 자들,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본이 되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10장의 결론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마시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언합니다.
바울의 삶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이었습니다. 복음에 매여 사는 삶이었습니다. 영혼구원에 전력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본을 보인 삶을 살았습니다. 로마서 14:21에도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고기와 포도주를 좋아한 흔적이 있습니다. 또 고기와 포도주는 음식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흔히 음식궁합이 맞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형제들에게 덕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탁월한 책이 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성적 독서를 위하여 많은 책 가운데 한 권의 책으로 제일 먼저 추천하는 도서입니다. 한 권을 읽으려면 이 책을 잃고, 많은 책을 읽으려면 제일 먼저 읽을 책이 이 책입니다. 아켐피스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처럼 사는 그 삶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닮아가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며, 영성적 삶입니다.
존 뉴턴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찬송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작사한 목사님입니다. 그는 11살 때 선장인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기 시작하여 영국왕실의 해군이 되었습니다. 20대에 노예무역에 가담하여 21살에 노예선 그레이하운드의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도덕을 비웃고 종교를 조롱하며 살았는데 우연히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청난 파도가 몰려와 9시간의 사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배 안에 물이 차서 배가 곧 뒤집히게 되자 뉴턴은 “주여,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성난 바다에서 살아남은 그가 영국으로 돌아와 지은 찬송이 바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입니다. 그는 후에 목사가 되어 설교자로 남은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한 권의 책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게 하였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며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얼마나 귀중한 신앙의 삶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리시우의 테레사는 “물질적이든 또는 그 밖의 무엇이든 간에 욕망이 생길 때 그것에 응답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욕망이란 죄는 그리스도를 를 본받을 때 제어되고 사라집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훈련의 목적이며 결론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면 죄와 멀어지고 하늘나라와 가까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참다운 윤리나 도덕은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도덕성을 삶의 영성이라고 늘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 일체된 삶인 영성이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 도덕성이라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예수님처럼 되려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두 가지 습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두 가지 가운데 하나는 기도하는 습관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을 읽는 습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예수님의 습관을 잘 본받고 살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됩니다.
찰스 쉘던의 소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보신 분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제일교회의 헨리 맥스웰목사님은 설교준비를 하는 시간에 한 실직자가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목사님은 설교준비하는 시간이라고 사과하고 실직자를 돌려보냈습니다. 다름 주일 아침 그 실직자는 교회에 찾아와서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목사님은 고민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1년간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삶의 주제를 가지고 살자고 합니다. 이 일에 동참한 교인 가운데는 지방 신문사의 사장, 회사의 중역임원, 소프라노 성악가 등이 참여합니다. 신문사의 사장은 신문에 선정적인 기사와 술, 담배광고 등을 빼고 많은 경영의 손해를 보았습니다. 회사의 중역은 회사의 비리를 고발하여 실업자자 되었습니다. 이 일에 동참하기로 약속한 서약자들은 한 결 같이 고통을 수반하였지만 신념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모두가 놀라운 결과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에 하나님은 절대로 손해를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모창가수들이 많이 있습니다. 배칠수, 조용팔, 너훈아, 임희자 등 가수들을 빼닮은 가수들입니다. 그들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옷이나, 헤어스타일이나, 표정이나, 액세서리 등 모두 모방하다보니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닮기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흉내 내고, 닮은꼴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본받고 닮은 살게 됩니다.
제가 손양원목사님의 순교를 기리는 단체의 이사장을 지냈습니다. 손양원목사님은 그의 삶을 연구하다보면 정말 예수님을 닮은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미국 선교사의 아들로 순천에서 태어난 의사 인요한박사는 자기가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손양원목사님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게 되면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디모데전서 1:16에는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상생애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본이 되게 하시려는 삶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그 본을 잘 보고 닮은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나를 본받으라고 할 수 있게 삽시다.
고린도전서 11:1 하반절에는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는 이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를 본받으므로 이 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면 이전의 삶, 이 전의 죄인이었던 어리석음, 이전의 더러움이 다 가려지고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됩니다.
바울의 생애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삶입니다. 이전의 삶을 바울은 디모데전서 1:13에서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후의 삶을 빌립보서 1:20에서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합니다. 다메섹 이후의 바울은 복음만, 그리스도만, 십자가만 바라보고 증거하는 삶이었습니다. 이전의 죄인의 모습이 이후의 의인의 모습으로 다 가려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감히 “본받으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3:17에는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인과 같은 권면을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헌신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며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아마 바울은 고린도교회만 아니라 모든 교회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미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면에서 본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감에 넘칩니다. 이런 자신감이 바울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라고 할 수 있는 자신감도 준 것입니다.
세상을 본받고 사는 아버지가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도박에 빠져있고, 늘 술에 취해 있고, 도둑질을 하고, 강도질을 하고, 조폭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나를 본 받으라”고 하겠습니까? 이런 삶을 아들에게 물려주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나처럼 살지 말아라”고 할 것입니다. 잘못 살고, 못된 사람도 이런 삶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을 듯합니다. “나 같이 도박해라”고 아들에게 권하는 아버지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이를 미워하는 것은 그 사람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같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워한다는 것은 같다는 말이고 미워하면 닮는다는 말입니다.
‘각인효과’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갓 태어난 오리새끼는 처음 본 대상을 어미처럼 따라다니고 심지어 사랑한다고 합니다. ‘각인효과’의 후속이 있습니다. 너구리를 대상으로 어떤 학자가 실험하였습니다. 너구리가 자기를 따라다녔는데 얼마 후에 자기도 너구리의 행동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상호각인효과’라고 합니다. 서로 가까이 하고 서로 사랑하면 이렇게 닮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닮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본받기 원하면 사랑하면 됩니다. 닮기 원하면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은 둘이 하나 되게 하는 힘입니다. 사랑은 공동체 모두가 하나가 되는 기술입니다. 바울처럼 “나를 본받으라”라고 하려면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내가 사랑받도록 살면 그 사람은 나를 닮게 됩니다.
“나 따라 해봐”라는 유아들의 그림책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따라하면서 배우게 됩니다. 아이들의 언어나, 관습이나, 삶 전체는 흉내 내기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것을 흉내 내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하면서 비우고, 흉내 내면서 배웁니다. ‘나를 따라 해봐’라는 말은 ‘나를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따라하면 반드시 닮게 되고 본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4:12에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신앙의 모범을 산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과 서로 사랑하였기 때문에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교인들에게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6:29에는 아그립바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바울은 자신의 헌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7:8에는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결혼을 하지 않고 정절을 지킨 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3에는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힘쓴 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6:10에는 디모데에게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주의 일에 힘쓴 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런 갖가지 자신의 신앙의 삶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7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최고의 칭찬과 격려를 합니다. 교회가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었다면 얼마나 신앙의 삶이 모범적이었겠습니까? 그들의 삶이 다른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다면 다른 것은 권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이런 칭찬을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른 믿는 자들의 믿음을 보이며 살기를 바랍니다.
결론
로마서 12:2에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필립스 번역에는 “세상이 너희를 그 틀 속으로 끼워 맞추지 못하게 하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미국의 인권목사였던 마르틴 루터 킹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본문으로 설교를 하면서 크리스천은 세대를 본받지 않는 자가 될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창조적 부적응자’가 될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피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야합니다. 세상에 살면 저절로 적응하게 되는데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방법이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나이기에 ‘나를 본 받으라’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이 세상에 대하여 창조적 부적응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창조적 부적응자가 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늘나라에 창조적 적응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 자신을 보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려고 늘 애썼으나 그리스도를 닮기에는 부족한 점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의 목회를 돌이켜보면 “나를 본받으라”고 하기엔 너무나 부끄러운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노력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먼저 본받읍시다. 그리고 우리 가족, 우리 자녀, 우리 이웃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하는 자신감을 가지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목: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2018년 12월 16일
성경: 잠언 4:10-12, 고린도전서 11:1-2
서론
‘모델링’이란 말은 심리학자 밴듀라가 처음 사용한 용어입니다.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하여 스스로 변해가는 것’을 모델링이라 합니다. 누구를 모델링의 대상으로 삼느냐 하는 것은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 효과가 있습니다. 모델링은 세 가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관찰과 학습의 효과입니다. 둘째는 어떤 행동을 억제하는 억제 효과와 억제되어 있던 행동을 다시 활성화하는 탈억제효과가 있습니다. 셋째는 동일시(identification) 효과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모델로 삼고 살면 그 사람과 내가 동일시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놀다보면 금방 닮아갑니다. 서로가 서로의 ‘역할모델’(role model)이 된다는 말입니다. 서로 함께 하다보면 말하는 것이나, 먹는 것이나, 일이나 사고하는 스타일이 비슷해지는 것은 서로가 ‘역할모델’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를 연구하는 동안 종종 친구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물리학, 철학, 문학 등 다양한 방면의 주제를 던져놓고 토론하였다고 합니다. 세계최고의 물리학자도 존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룹을 지어서 그들을 ‘역할모델’로 활용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닮을 줄 알고, 본받을 줄 아는 넓은 마음이 위인의 아량입니다.
사람들은 함께 살다보면 저절로 닮아갑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자녀들은 자기도 모르게 부모를 닮아가고 생긴 모습뿐만 아니라 행동과 삶이 ‘붕어빵’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존경하는 선생님을 제자들은 닮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부부가 닮아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회적 적응’이란 사회학적인 용어가 있습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본받아 닮아가려고 하는 본능입니다. 저도 평안도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 교회를 섬길 때 저도 모르게 평안도 사투리를 많이 쓰게 되었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 ‘부전자전’(父傳子傳), ‘유유상종’(類類相從), ‘초록동색’(草綠同色) 같은 용어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부나 부모와 자녀나 같은 유의 사람들이나 누구나 함께 있으면 본받아 닮게 되는 것이 자연적인 인간관계의 이치입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장교들은 ‘돌격 앞으로’라는 말을 절대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대신 ‘나를 따르라’라고 한다고 합니다. 부하들을 앞서 보내고 지휘관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휘관이 앞서고 부하들을 뒤에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부하가 지휘관을 따를 때, 부하직원이 상사를 따를 때 몸만 따른다면 한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따라야 온전히 따를 수가 있습니다. 윗사람이 본이 되고 모델이 돼야 아랫사람이 기쁘게 따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멘토’의 자격이 있습니다. 멘토는 멘토리에게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멘토는 멘토리와 깊은 유대관계가 있는 사람입니다. 멘토는 교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멘토는 멘토리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멘토는 멘토리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본받다’라는 말의 헬라어 단어 ‘미메타이’(mimetai)는 ‘모방하다’ 혹은 ‘그림자’라는 뜻입니다. 모방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행한 것을 보고 조금도 더함이나 덜함이 없이 그대로 따라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방이란 창조의 앞걸음입니다. 어떤 이를 모방하고 본받다 보면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지게 되는 법입니다.
요즘 ‘짝퉁’하면 중국을 떠올립니다. 중국은 정말 짝퉁의 천국입니다. 명품이라고 말하는 의류, 시계, 가방, 신발뿐만 아니라 심지어 계란도 짝퉁이 있다고 합니다. 짝퉁을 보면 진품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고 기술력도 대단한 것을 발견합니다. 짝퉁천국이라고 중국을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한 때 그랬습니다. 어떤 제품을 모방하여 짝퉁을 만들다 보면 기술력이 발달하여 진품을 능가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모방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이십니다. 바울은 오늘의 성경본문에서 먼저 그리스도가 자신의 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으로 삼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본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5:3에는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합니다. 베드로도 교회의 일꾼들에게 성도들의 본이 되라고 권합니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이 되고 그리스도의 본을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됩시다.
고린도전서 11:1 상반절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평생 그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애쓴 사람입니다.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그의 생각과 삶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의 전 생의 삶은 그리스도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소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지식을 버렸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 때문에 자신의 삶도 다 버렸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를 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신앙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기를 좋아하지만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신앙이 약한 자들,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본이 되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10장의 결론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마시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언합니다.
바울의 삶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이었습니다. 복음에 매여 사는 삶이었습니다. 영혼구원에 전력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본을 보인 삶을 살았습니다. 로마서 14:21에도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고기와 포도주를 좋아한 흔적이 있습니다. 또 고기와 포도주는 음식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흔히 음식궁합이 맞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형제들에게 덕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탁월한 책이 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성적 독서를 위하여 많은 책 가운데 한 권의 책으로 제일 먼저 추천하는 도서입니다. 한 권을 읽으려면 이 책을 잃고, 많은 책을 읽으려면 제일 먼저 읽을 책이 이 책입니다. 아켐피스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처럼 사는 그 삶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닮아가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며, 영성적 삶입니다.
존 뉴턴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찬송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작사한 목사님입니다. 그는 11살 때 선장인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기 시작하여 영국왕실의 해군이 되었습니다. 20대에 노예무역에 가담하여 21살에 노예선 그레이하운드의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도덕을 비웃고 종교를 조롱하며 살았는데 우연히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청난 파도가 몰려와 9시간의 사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배 안에 물이 차서 배가 곧 뒤집히게 되자 뉴턴은 “주여,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성난 바다에서 살아남은 그가 영국으로 돌아와 지은 찬송이 바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입니다. 그는 후에 목사가 되어 설교자로 남은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한 권의 책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게 하였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며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얼마나 귀중한 신앙의 삶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리시우의 테레사는 “물질적이든 또는 그 밖의 무엇이든 간에 욕망이 생길 때 그것에 응답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욕망이란 죄는 그리스도를 를 본받을 때 제어되고 사라집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훈련의 목적이며 결론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면 죄와 멀어지고 하늘나라와 가까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참다운 윤리나 도덕은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도덕성을 삶의 영성이라고 늘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 일체된 삶인 영성이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 도덕성이라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예수님처럼 되려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두 가지 습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두 가지 가운데 하나는 기도하는 습관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을 읽는 습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예수님의 습관을 잘 본받고 살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됩니다.
찰스 쉘던의 소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보신 분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제일교회의 헨리 맥스웰목사님은 설교준비를 하는 시간에 한 실직자가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목사님은 설교준비하는 시간이라고 사과하고 실직자를 돌려보냈습니다. 다름 주일 아침 그 실직자는 교회에 찾아와서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목사님은 고민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1년간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삶의 주제를 가지고 살자고 합니다. 이 일에 동참한 교인 가운데는 지방 신문사의 사장, 회사의 중역임원, 소프라노 성악가 등이 참여합니다. 신문사의 사장은 신문에 선정적인 기사와 술, 담배광고 등을 빼고 많은 경영의 손해를 보았습니다. 회사의 중역은 회사의 비리를 고발하여 실업자자 되었습니다. 이 일에 동참하기로 약속한 서약자들은 한 결 같이 고통을 수반하였지만 신념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모두가 놀라운 결과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에 하나님은 절대로 손해를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모창가수들이 많이 있습니다. 배칠수, 조용팔, 너훈아, 임희자 등 가수들을 빼닮은 가수들입니다. 그들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옷이나, 헤어스타일이나, 표정이나, 액세서리 등 모두 모방하다보니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닮기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흉내 내고, 닮은꼴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본받고 닮은 살게 됩니다.
제가 손양원목사님의 순교를 기리는 단체의 이사장을 지냈습니다. 손양원목사님은 그의 삶을 연구하다보면 정말 예수님을 닮은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미국 선교사의 아들로 순천에서 태어난 의사 인요한박사는 자기가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손양원목사님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게 되면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디모데전서 1:16에는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상생애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본이 되게 하시려는 삶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그 본을 잘 보고 닮은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나를 본받으라고 할 수 있게 삽시다.
고린도전서 11:1 하반절에는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는 이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를 본받으므로 이 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면 이전의 삶, 이 전의 죄인이었던 어리석음, 이전의 더러움이 다 가려지고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됩니다.
바울의 생애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삶입니다. 이전의 삶을 바울은 디모데전서 1:13에서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후의 삶을 빌립보서 1:20에서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합니다. 다메섹 이후의 바울은 복음만, 그리스도만, 십자가만 바라보고 증거하는 삶이었습니다. 이전의 죄인의 모습이 이후의 의인의 모습으로 다 가려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감히 “본받으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3:17에는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인과 같은 권면을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헌신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며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아마 바울은 고린도교회만 아니라 모든 교회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미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면에서 본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감에 넘칩니다. 이런 자신감이 바울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라고 할 수 있는 자신감도 준 것입니다.
세상을 본받고 사는 아버지가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도박에 빠져있고, 늘 술에 취해 있고, 도둑질을 하고, 강도질을 하고, 조폭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나를 본 받으라”고 하겠습니까? 이런 삶을 아들에게 물려주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나처럼 살지 말아라”고 할 것입니다. 잘못 살고, 못된 사람도 이런 삶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을 듯합니다. “나 같이 도박해라”고 아들에게 권하는 아버지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이를 미워하는 것은 그 사람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같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워한다는 것은 같다는 말이고 미워하면 닮는다는 말입니다.
‘각인효과’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갓 태어난 오리새끼는 처음 본 대상을 어미처럼 따라다니고 심지어 사랑한다고 합니다. ‘각인효과’의 후속이 있습니다. 너구리를 대상으로 어떤 학자가 실험하였습니다. 너구리가 자기를 따라다녔는데 얼마 후에 자기도 너구리의 행동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상호각인효과’라고 합니다. 서로 가까이 하고 서로 사랑하면 이렇게 닮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닮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본받기 원하면 사랑하면 됩니다. 닮기 원하면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은 둘이 하나 되게 하는 힘입니다. 사랑은 공동체 모두가 하나가 되는 기술입니다. 바울처럼 “나를 본받으라”라고 하려면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내가 사랑받도록 살면 그 사람은 나를 닮게 됩니다.
“나 따라 해봐”라는 유아들의 그림책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따라하면서 배우게 됩니다. 아이들의 언어나, 관습이나, 삶 전체는 흉내 내기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것을 흉내 내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하면서 비우고, 흉내 내면서 배웁니다. ‘나를 따라 해봐’라는 말은 ‘나를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따라하면 반드시 닮게 되고 본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4:12에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신앙의 모범을 산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과 서로 사랑하였기 때문에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교인들에게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6:29에는 아그립바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바울은 자신의 헌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7:8에는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결혼을 하지 않고 정절을 지킨 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3에는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힘쓴 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6:10에는 디모데에게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주의 일에 힘쓴 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런 갖가지 자신의 신앙의 삶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7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최고의 칭찬과 격려를 합니다. 교회가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었다면 얼마나 신앙의 삶이 모범적이었겠습니까? 그들의 삶이 다른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다면 다른 것은 권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이런 칭찬을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른 믿는 자들의 믿음을 보이며 살기를 바랍니다.
결론
로마서 12:2에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필립스 번역에는 “세상이 너희를 그 틀 속으로 끼워 맞추지 못하게 하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미국의 인권목사였던 마르틴 루터 킹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본문으로 설교를 하면서 크리스천은 세대를 본받지 않는 자가 될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창조적 부적응자’가 될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피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야합니다. 세상에 살면 저절로 적응하게 되는데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방법이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나이기에 ‘나를 본 받으라’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이 세상에 대하여 창조적 부적응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창조적 부적응자가 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늘나라에 창조적 적응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 자신을 보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려고 늘 애썼으나 그리스도를 닮기에는 부족한 점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의 목회를 돌이켜보면 “나를 본받으라”고 하기엔 너무나 부끄러운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노력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먼저 본받읍시다. 그리고 우리 가족, 우리 자녀, 우리 이웃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하는 자신감을 가지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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