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봄은 겨울과 여름 사이의 계절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입춘’부터 ‘입하’전까지를 봄이라고 합니다. 천문학적으로는 춘분부터 하지까지를 봄이라고 하고, 기상학적으로는 3월, 4월, 5월을 봄이라고 부릅니다. 봄은 싹이 돋고 아지랑이가 피는 계절이며, 반갑잖은 손님인 황사, 미세먼지 등이 편서풍을 타고 우리나라로 오는 계절입니다. 봄은 다시 사는 계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특히 기독교의 절기인 부활절이 있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가 사계절이 분명한 것이 감사합니다. 요즘에는 봄도 실종되었고, 겨울에 ‘삼한사온’도 사라졌지만 사계절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든 계절에 적응력을 가지고 셰계 어디에 가나 잘 적응하는 민족이 되어 세계화에 유리한 특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서울지역 계절의 변화도 그 동안 많았습니다. 봄과 여름이 길어지고, 가을과 겨울이 짧아졌다고 합니다. 가을과 겨울은 지난 70년 사이에 31일이나 짧아졌습니다. 지난겨울에는 많이 추웠지만 이것 또한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이라고 합니다.
봄은 상징적으로 인생의 한창때를 의미합니다. “인생의 봄이 왔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희망찬 앞날의 행운을 말할 때도 “고생 다음에 희망찬 봄이 온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봄은 농부의 손이 분주한 계절입니다. 개구리나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계절입니다. 봄은 모든 면에서 움츠리고 있기엔 어울리지 않는 계절입니다. 봄은 깨는 계절이며, 일어나는 때입니다.
영국 시인 셸리는 “겨울이 왔다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아직도 겨울인가 싶더니 봄이 성큼 다가와 우리 앞에 있습니다. 봄이 올 것 같지 않게 겨우내내 찬바람이 불었지만 봄은 여지없이 찾아온 것입니다.
‘봄날’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임철우감독의 작품으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한 가족의 비극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리고 같은 제목의 ‘방탄소년단’의 댄스곡이 있습니다. 봄날은 모든 사람에게 생기발랄하게 하며, 다시 시작하는 희망의 계절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봄날이 되어도 다시 피지 못하는 인생이 있고, 슬픈 사연의 삶도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황제에게 상소하여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로 가는 배를 만나 출항하게 되는데 그레데의 뵈닉스항구에 가서 거기서 겨울을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계절이 항해하기에 좋지 않은 계절이므로 가지 말자고 했지만 백부장이 출항을 결정하였습니다. 지중해는 겨울에 항해하기가 좋지 않습니다. 결국 배는 파선하고 바울과 일행은 멜리데라는 섬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3개월 동안 겨울을 지나고 봄이 되자 다시 로마로 갔습니다. 봄은 모든 사람에게 다시 시작하고 일어나는 계절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의 노래입니다. 솔로몬의 1,005개의 노래 중에 유일하게 성경에 포함된 노래입니다. 주후 90년 유대 랍비들의 회의인 얌니야회의에서 39권의 구약을 정경으로 만들 때 정경에 포함되었습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여인의 사랑 이야기라고도 하고, 예수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남녀의 사랑에 빗대어 쓴 노래라고도 합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솔로몬의 사랑노래가 봄을 맞는 우리 노래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다시 일어나 사랑을 노래하기를 바랍니다.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윤동주의 ‘서시’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다시 깨어 일어나서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과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26:46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합니다. 제자들에게 결단과 용기의 말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용기와 결단으로 일어나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생땍쥐페리는 “정원사가 봄을 기다리듯 기적을 기다려라”고 합니다. 새봄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가 하늘의 기적을 맛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깨어나는 계절인 봄에 다시 일어나 함께 새 날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일어나야 합니다.
아가 2:10에는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합니다. 술람미여인을 사랑하는 솔로몬이 사모하는 정으로 지쳐있던 자신을 보면서 외치는 말입니다. 봄기운을 맞아 생기가 있고 회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겨울도 지나고”라고 합니다. 겨울은 추운 계절입니다. 식물의 성장이 멈추는 계절입니다. 모든 생물들의 활동이 제한되는 계절입니다. 더구나 성경적인 의미에서 겨울은 시련과 고통과 시험의 때를 암시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재림의 때가 고통의 때가 될 터인데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비도 그쳤고”라는 말은 팔레스타인의 겨울이 비가 오는 계절인 것을 말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우기는 9월, 10월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른 비의 계절입니다. 3월, 4월에는 늦은 비가 내리는데 비는 곡식에 유익하고, 은혜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겨울비는 추위를 몰고 오고, 한기를 더하게 하여 활동에 제한을 받습니다. 그래서 겨울비는 시련니아 고난 등을 암시합니다. 산상보훈에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서 집이 무너진다”고 말합니다. 더구나 겨울비는 고통의 상징인 것이 분명합니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입니다. 모든 것이 다시 기지개를 켜고 활동을 재개하는 계절입니다.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입니다. 사람의 움츠렸던 마음이 피어날 때를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봄의 계절적 의미는 겨울잠에서 깨어날 때를 말합니다. 다시 일어날 때를 상징합니다. 봄은 잠자기에 좋은 때가 아닙니다. 다시 일어나서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할 때를 일컫습니다.
밤은 잠을 자야 하는 시간입니다. 아침은 일어나야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생체리듬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밤이 되면 졸립고, 아침이 되면 눈이 떠집니다. 생체리듬에 적응이 되어 있으면 사람의 몸은 저절로 그렇게 조절되어 있습니다.
화가 보디첼리의 ‘봄’이란 작품은 르네상스를 대변하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중세에는 주로 성경에서 소재를 찾는 종교화였는데 이 작품은 전혀 다른 소재를 택하고 있습니다. 중세에는 사람보다 옷이나 장신구가 더 화려했지만 르네상스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리려고 하는 시도가 드러납니다. 그 그림에도 사랑이 묻어 있습니다. 신들이 봄을 맞아 밖으로 나왔습니다. 큐피드가 활을 들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맺어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피어나고, 사랑하는 계절이 봄의 주제입니다. 중세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한 그림입니다.
영혼의 봄은 잠잘 때가 아닙니다. 선지자 요나를 보세요. 영혼이 깊이 잠들어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고 했지만 그는 다시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잠든 요나를 사람들이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하며 깨웁니다. 일어나야 할 때에 잠들어 있는 것은 영혼이 병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모두 다 깨어서 일어날 때 혼자 잠들어 있으면 그 사람은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 영혼과 마음이 일어나라고 외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엡5:14), “일어나 건축하자”(느2:18),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고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을 깨웁니다. 우리의 영혼이 늘 깨어 있어야 하고, 잠 들었더라도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정의에 대하여, 개혁을 위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영혼이 잠자는 자여 깨어 일어나라”고 정신을 흔듭니다. “청년들이 일어나라”고 주님을 죽은 영혼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하시며 다시 회개의 자리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시며 새로운 결단을 위해 일어나야 때임을 일러주십니다.
이사야 60:1에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을 향해 일어나야 하고, 세상이 어둡기에 빛을 발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면 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세상의 빛인 우리가 세상에서 빛을 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입니다. 일어나야 빛을 발할 수가 있습니다. 일어나서 빛을 발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한사람이 설교시간 내내 졸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 도중에 “하나님 편에 있는 자들은 다 일어나 보십시오”라고 했는데 잠든 사람만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다시 “악마 편에 있는 자는 일어나 보십시오”라고 했는데 잠들어 있던 사람은 “일어나”란 말만 듣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모두가 당황하였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저는 이 세상 끝까지 목사님을 따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목사님과 저만 같은 편입니다. 목사님과 저만 일어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일어나되 잘 일어나야 합니다.
사도행전 9:40에는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고 합니다. 다비다라는 성도들을 잘 섬기던 여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에는 사람이 죽으면 죽는 즉시 장례를 치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 보면 죽은 즉시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다비다의 경우는 죽었지만 시체를 잘 닦아 다락에 두었습니다. 당시의 장례법에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너무 애처롭게 생각한 나머지 장례를 치르지 않고 다시 일어나기를 기대하면서 베드로가 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 죽지 않고 일어나기를 간절하게 고대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며,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함께 가야 합니다.
아가 2:13에는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합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서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에 열매가 익었고 향기가 진동한다고 합니다.
저자는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일어나 함께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함께 가고 싶은 자이고, 사랑하는 자가 함께 가면 어떤 일이라도 힘들지 않습니다. 일어날 때 머뭇거리지 않고 사랑하는 자와 함께 갈 때 활동이 힘이 납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함께 일하러 가야 할 때가 되었음을 일러줍니다.
‘함께’ 하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함께 하는 것은 가장 큰 힘이 됩니다. 함께 하는 것은 가장 인격적인 방법입니다. 함께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3:14에는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세우신 목적은 함께 있게 하고, 전도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게 하고, 병든 것을 고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삼으신 제1목적이 바로 ‘함께 하게 하심’입니다. 함께 하는 것 이상으로 제자가 스승에게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누군가가 길을 물어보고 길을 안내할 때에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약도를 정확하게 그려주고, 가는 길을 말로 잘 설명해 주어도 함께 가는 것보다는 못합니다.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좋은 길안내입니다. 함께 간다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다른 부탁이 필요 없습니다. 함께 가는 그 자체가 설명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예수님 탄생의 목적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명령’의 끝에 보장을 해주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든든한 말씀입니다. 이 두 가지의 의미는 첫째,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다는 뜻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지금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임마누엘’이 되신 메시지가 우리에게 곳곳에서 전달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듯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모름지기 ‘임마누엘’을 닮아야 합니다.
아가서는 예수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빗대어 하신 노래라고 해석합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이 교회와 그리스도를 빗대어 부부에 대한 권면을 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을 받은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함께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베다니의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하시며 “유대로 가자”고 하십니다. 방금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던 유다로 다시 가자고 하자 도마는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합니다. 도마가 예수님이 죽으러 가신다는 말을 듣고 자포자기한 말이라고 하지만 주님은 우리와 함께 끝까지 가십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과 끝까지 함께 가야 합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겟세마네 동산까지 주와 같이 가려네”가 우리의 다짐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6:33에는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절대로 버리지 않고 함께 하겠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끝까지 함께 가겠다고 하던 베드로는 함께 할 자신감이 있었지만 다른 제자들은 도망을 가고 버리지 않았는데 베드로 혼자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과 함께 하였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고, 로마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배드로는 죽음까지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제7권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은 내 안에 계셨지만 나는 밖에 있었습니다. 나는 밖에서 당신을 찾았습니다. 추한 나는 당신이 창조한 아름다운 것들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계셨지만 나는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잠시도 떠나신 적이 없는데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지 못한 부족한 존재들입니다.
로마서 8:17에는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함께 즐거움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함께 고난에도 동참하는 일입니다.
존 셰어의 ‘차별 없는 주인’이란 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되었든 기꺼이 함께 앉아 즐길 각오가 되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잔치는 열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셰어는 여기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단 한 가지 조건은 어떤 사람이든지 함께 앉아 즐길 수 있는 열린 마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과 함께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혼자 애굽에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형 아론과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형 아론과 함께 가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내가 함께 가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 혼자, 내 판단대로, 내 지식이나 경험을 의지하고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자동차 왕이라고 불리는 헨리 포드는 “화해하는 것은 시작이고, 도와주는 것은 진보고, 함께 일하는 것은 성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누구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은 최고의 성공입니다. 일의 결과가 아니라 함께 하는 자체가 이미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면 평안합니다. 모든 과정에서 안심이 됩니다. 어떤 결과를 주시든지 감사가 넘칩니다. 결과에 관계없이 성공한 삶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일어나 하나님과 함께 나가고 일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마태복음 16:2-3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합니다. 시대에 대한 분별력은 큰 지혜입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봅니다. 지금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 “몇 시냐?”라고 합니다. 시간에 대한 민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시간을 잘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3:11에는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합니다. 지금 이 시간은 기상시간입니다. 취침시간이 아닙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서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도 뛰기 시작하고, 깊은 잠을 자던 곰도 활동을 시작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자들도 깨어 일어날 때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긴 잠에서 깨어나서 ‘다시 세상 속으로’ 예수님과 함께 들어가서 외치고,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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