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달빛이 햇빛 같이 되는 날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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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성희 담임목사
설교일 2018.6.3
설교본문 이사야 30:23-26 / 요한계시록 22:3-5

서론

모성애나 부성애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주신 독특한 본능의 하나입니다. 지난 주간 ‘동물의 세계’에서 아주 특이한 생태계의 조화를 보았습니다. 우기가 되어 세렝게티 초원에 누 떼가 물을 찾아 몰려옵니다. 그 때 갖 태어난 누 새끼가 사자의 표적이 되자 어미가 버티다가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사자가 새끼 누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새끼 누는 어미를 혼돈했는지 사자에게 애정을 표현합니다. 그랬더니 사자는 끝내 새끼 누를 잡아먹지 않았고 새끼 누는 어미 누를 기적처럼 용케 만나게 되었습니다. 포식자도 모성애는 얼마나 유난한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인간의 모성과 부성이 유별하다고 말하지만 동물의 모성과 부성이 때로는 인간에 비해 조금도 덜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황제펭귄이나 가시고기처럼 종족보존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부성이 아주 특별한 동물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보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편애하신 것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스라엘의 종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은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방에게 “내 백성을 구속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가 너를 눈동자같이 지키셨다”고 하십니다. “물이 침몰치 못하게 하며 불이 사르지 못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네 아버지는 너를 버려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으리라”고 하십니다.
이사야 43:4에는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4:8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합니다. 요한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얘기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요한이 말년에 제자들의 부축을 받고 강단에 올라가면 긴 설교를 하지 못하고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한 마디를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한 마디에 성도들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랑의 사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인애’로서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십니다. ‘은혜’로서 분에 넘치는 호의를 베푸십니다. ‘자비’로서 자기 백성을 향한 동정적 연민의 마음을 가지십니다. ‘오래 참으심’으로 오랜 기간 동안 심판을 철회하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구원과 은혜를 제공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사랑을 드러내시는데 특히 자비하시고, 오래 참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자비’란 원래 불교에서 사용하던 용어였습니다. 오래 전 한글 성경을 번역할 때 불교용어인 ‘자비’를 하나님께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해탈하여 열반에 들어간 사람이 열반에 들지 못한 중생을 향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에 대해 사랑을 베푸시고, 동정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본성적 마음을 일컫습니다. 불교의 자비는 사람의 마음이지만 기독교의 자비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최고의 지혜, 참 지혜는 자신과 하나님을 참되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가련하고 상실된 죄인들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하시려고 열망하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비란 아픈 마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늘 아파하신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끝이 없습니다. 로마서 11:2에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라고 하신대로 하나님은 절대 이스라엘을 모르는 척하시거나 버리지 않으십니다. 요한복음 13:1에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자기 사람들의 장점만 보시고, 나쁜 점은 못 본척하시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백성을 싸매시며 고치시는 날이 있습니다.

이사야 30:26 상반절에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이라고 합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은 먼저 백성들의 상처를 싸매시며, 맞은 자리를 고치십니다. 상처를 가지고 있으며, 매를 맞았다면 백성들의 잘못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픈 사람을 우선 고치시고 다음에 야단을 치시고 잘못을 물으십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일차적인 사랑은 상처를 치유하는 일입니다. 우선 아픈 곳을 고쳐놔야 그 다음 일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아픈 것을 고치기 전에는 어떤 경고나 권면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세요. 강도 만난 사람에게 사마리아인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상처에 포도주를 붓고 아픈 곳을 싸매고 치료하는 일이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도 강도를 만나게 된 자신의 잘못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혼자 길을 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길에서 강도들이 수시로 출몰하기 때문에 여럿이 떼를 지어 가는 것이 상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의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고 우선 치료해 주었습니다. 최우선은 아픈 곳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기적을 잘 보세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편 손 마른 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을 책잡고자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시는가 안 지키시는가를 보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예수님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 보다 환자를 고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기 위하여 귀신을 돼지에게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돼지 2,000마리 보다 귀신 들린 한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혈루증을 앓던 한 여인이 가까이 와서 옷 가에 손을 대었을 때 낫게 하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혈루증 환자는 군중들 가까이 오지 못하고 가족들과도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는 율법 보다 환자를 치유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다 물에 빠졌을 때에 믿음이 적다고 책망하기 전에 우선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건져 주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라는 책망보다 손을 내밀어 건지시는 것이 예수님께는 우선적인 일이었습니다. 야단을 치거나, 책망을 하거나, 저주하는 것보다 사랑하고, 건지고, 치유하고, 보호하는 것을 앞서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아픈 사람에게 일단 보호하고,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대교부 크리소스토무스는 “너 자신 외에 그 어느 것도 너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상처를 가지고, 맞은 것의 원인을 따지고 보면 모두 자신의 과오 때문입니다. 자신의 과실인 불순종이나, 지나친 욕망이나, 이기적인 자기중심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직접 고치십니다.
배우 김혜자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이 있습니다. 남대문교회의 권사이신 김혜자씨는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봉사한 경험으로 환경 때문에 못 먹고 태어나면서부터 병과 고통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잠언 13:24에는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때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때리라고 합니다. 분풀이의 매가 아니라 사랑의 매를 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훈계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를 채찍질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받으시는 아들을 징계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지금도 채찍을 드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버린다’(Spare the rod, spoil the child)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자녀를 엄히 훈계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모라도 자녀에게 폭력은 절대 금물입니다. 자녀에게 화풀이의 몽둥이를 들지 말고 하나님처럼 자녀에게 사랑의 매를 들어야 합니다.
‘엄친자당’(嚴親慈堂)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엄하신 분이고, 어머니는 자애하신 분이십니다. 아버지가 때리면 어머니는 안아주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부성과 모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시기에 이 두 가지 역할을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에게 아버지처럼 채찍으로 때리고 징계하시고, 어머니처럼 상처를 어루만져주십니다.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해를 입힌 다음에 어루만지거나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부정적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이 말은 지극히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병을 주시기도 하고 아프게 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픈 상처를 차마 보시지 못하고 상처를 싸매기 위하여 약을 주십니다.
시편 147:3에는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라고 합니다. 흔히 ‘엄마 손은 약손’이라고 하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손은 약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약손이 맞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에 만져 주시면 나았습니다. 만져주시면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욥기 5:18에는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라고 합니다. 싸매시고 고치실 것 같으면 안 아프고 안 상하게 하시면 될 것을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렇게 하시는 것도 다 사랑하는 사람을 유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호세아 6:1에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훈계의 방법은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낫게 하시려고 찢으시고, 싸매시려고 치십니다. 불순종하여 죄를 지은 백성들을 찢으시고 치시지만 하나님은 그것보다 낫게 하시고 싸매시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시대의 사역자를 ‘상처 입은 치유자’로 정의하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고통이 상처 입은 자에게 치유의 원천이 된다는 뜻입니다.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고통이나 아픔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상처를 제일 많이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죽이셨지요?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이 없다는 소리도 듣지요? 하나님께 대한 비난과 폄훼가 끊임이 없지요? 이 얼마나 큰 상처입니까? 하나님이시니까 당하시고 하나님이시니까 견디시는 고통과 상처가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고, 아픈 자를 치유하시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치유기적은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는데 이런 자를 만나셔서 단 한 번도 외면하시거나 거절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과, 상처를 고치시고, 싸매시고,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과 상처들이 치유되는 놀라운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 날의 빛은 이전보다 일곱 배나 더 밝은 빛입니다.

이사야 30:26 하반절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날에는 어두운 달빛이 밝은 햇빛같이 변하고, 햇빛은 더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일곱 배의 빛이란 일주일의 빛이 하루에 집중되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일주일의 빛이 한꺼번에 비췬다는 것은 최고의 밝기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날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밭에 뿌린 종자에 비가 충분히 내려 곡식이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소나 나귀의 먹이가 넘칠 것입니다. 개울과 시냇물이 마르지 않고 흐를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자비로 베푸시는 온전한 평화를 말합니다.
칠흑 같은 밤의 달빛은 밝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 때 달빛은 길을 비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밝은 햇빛에 비하면 달빛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낮에 나온 반달’이란 동요도 있지만 밝은 햇빛 아래서 낮에 나온 반달은 희미하고 눈에 잘 띄지도 않습니다.
달빛은 흔히 ‘으스름하다’고 표현하고, 햇빛은 ‘눈부시다’라고 합니다. 과일이 익기 좋은 따끈따끈한 햇살은 얼마나 눈부신지 모릅니다.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는 여름에 비가 전혀 오지 않습니다. 여름 내내 얼마나 해가 따가워서 과일들이 잘 익어 맛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따가운 햇빛을 미국사람들은 ‘캘리포니아 썬’(California Sun)이라고 부릅니다. 햇빛은 과일을 익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 자체가 생명입니다.
햇빛은 치유효과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시간차가 있는 외국에 가서 빨리 시차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루에 30분 이상 햇빛을 보라고 합니다. 햇빛은 살균효과가 있습니다. 햇빛을 보면 비타민 D의 효능을 가지기 때문에 햇빛을 보는 것은 건강에도 좋다고 합니다. 사람이 해를 보고 살아야 건강합니다. 성경에 ‘치료하는 광선’이란 말이 있는데 어떤 이는 ‘치료하는 광선’은 햇빛이라고도 합니다.
말라기 4:2에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합니다. ‘일곱 날의 빛’이 무엇일까요? 아픈 데를 치료하는 하나님의 광선일 것입니다.
해는 생명입니다. 생물이 성장하고 생존하는데 해는 필수 요소입니다. 해가 빛을 잃으면 모든 생물이 멸종할 것입니다. 햇빛은 살리는 일을 합니다. 누가복음 23:44에는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라고 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죽으시므로 온 세상에 생명인 해가 빛을 잃어 어두워졌습니다. 해가 빛을 잃으면 아무 것도 살 수 없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적 의미의 햇빛은 치료이며, 희망이며, 회복입니다. 그리고 일반적 의미는 자유입니다. ‘광복절’은 잃은 빛을 찾은 날입니다. 자유를 뺏기면 빛이 없는 것입니다. 전 세계가 애창하는 찬송가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가사에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라고 합니다. 구원은 생명이며 생명은 광명입니다.
달빛은 사색, 묵상, 낭만, 정감 같은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우울, 비통, 자살 같은 부정적인 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달빛은 긍정과 부정 양면의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우울할 때 기분 좋아지는 음악이 드뷔시의 ‘달빛 소나타’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울할 때 기분이 좋아지는 음악은 없습니다. 우울할 때 ‘달빛 소나타’를 들어보세요. 기분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베토벤의 ‘월광소나타’도 그렇습니다. 원래 곡명은 ‘화상곡풍 소나타’인데 평론가 루트비히 헬슈타프가 1악장을 “스위스 루체른 호수의 달빛 물결 사이로 흔들리는 작은 배”라고 표현하여 ‘월광’으로 불리었습니다. 저도 좋아하는 곡이지만 낭만적이고 고요한 음악입니다. 분명 달빛은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게 만드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시편 56:13에는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합니다. 사망은 빛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은 빛이 있으므로 실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촛불에 감사하는 자에게 달빛을 주시고 달빛에 감사하는 자에게 햇빛을 주시고 햇빛에 감사하는 자에게 천국의 빛을 주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감사하는 자에게 꺼지지 않는 천국의 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 성가의 가사에는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라고 하는 은혜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일곱 배의 빛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어둠이 없고 빛만 있는 곳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한계시록 22:5에는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라고 합니다. 밤이 없으면 잠은 언제 잡니까? 하늘나라에 가면 잘 필요가 없습니다.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고 하나님과 천사들과 구원받은 성도들과 잔치에 참여하여 먹고 즐기느라 잘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빛의 삶입니다.

결론

영성가 로널드 롤하이저는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온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모든 인간은 넘어지고 떨어지고 데고 거부당하고 학대를 받는다. 깊은 상처 없이 어른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상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은 이런 사실에 대하여 두 가지 큰 착각을 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은 편안히 사는데 자기 혼자 상처를 안고 산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가 안고 있는 상처는 아물지 않고 절대로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고 있는 상처 때문에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상처는 우리로 하여금 치료의 전문가가 되게 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돌아보면 외세에 의하여 상처투성이입니다. 대륙에서도 섬에서도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일만 계속해 왔습니다. 지금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모두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나라들입니다. 이런 상처 때문에 오히려 세계를 치료하고 베푸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상처는 우리보다 하나님께서 더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친히 고쳐주십니다. 하나님은 희미한 달빛이 찬란한 햇빛이 되게 하셔서 구원의 소망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자비로 사는 우리와 우리민족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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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III (4): 사랑은 율법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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