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프랑스의 무신론 철학자인 볼테르는 “성경과 기독교는 백년도 못가서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볼테르는 1778년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과 기독교는 지금도 건재합니다. 볼테르는 인생을 카드게임에 비유하여 “게임에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혼자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인생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참으로 힘겨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볼테르가 죽을 때 주치의에게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았어요. 내 생명을 6개월 연장해 준다면 당신에게 내 재산 절반을 주겠소”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당하였다. 나는 지옥에 가노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그를 버렸습니까?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을 버리고 홀로 인생을 망치고 힘겹게 살다가 버림받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었습니다. 얼마나 불쌍한 인생이었습니까?
시편 94:14에는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성경 곳곳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얼마나 아끼시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일회성’(disposability)이 발달한 시대입니다. 일회성의 발달로 삶이 편리한 것 같지만 오히려 쓰레기가 많아지고, 자원의 낭비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편한 삶을 살려고 하다 보니 일회용품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일회용을 쓰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한번 쓰고 버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 이제는 부모도, 부부도, 자녀도 자꾸 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머릿속에도 내 교회라는 교회에 대한 소유의식보다 필요에 따라 아무 교회나 가는 일회성이 발달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는 일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나 자원이나 쓰고 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귀하지 않는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일회용 생명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물질도 ‘질량보존의 법칙’에서 보듯이 어떤 물질이 다른 물질로 생성된다고 하더라도 질량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어느 물질도 일회성은 없습니다.
창세기 6:4에는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멸망하게 하시기 전 죄로 가득한 세상에 네피림이 있었습니다. 민수기 13:33에는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점령했을 때에 그 땅에 네피림이 있었습니다. ‘네피림’이란 ‘네팔’(nephal)이란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 타락을 뜻합니다. 네피림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죄가 만연한 가인의 자손들을 일컫습니다.
성경은 가인의 자손과 아벨의 자손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가인의 자손은 하나님을 버리고, 회개하지 않고,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자손을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래 전 ‘고려장’이라는 늙고 쇠약한 부모를 산에 버렸다는 설화가 전해지지만 역사적 사실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늙고 쇠약해진 사람을 버리셨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이 부르셔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시고, 100세에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80세에 부르셔서 40년을 더 일하게 하시고 120세에 죽이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내어버리는 고려장은 없습니다.
로마서 11:2에는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절대로 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초라한 모습입니다. 주변강국들에 비하여 이스라엘은 약소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시면 민족도 나라도 개인도 끝나고 맙니다. 남과 북이 분단되고, 나라가 망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버리신 것이 아님을 하나님은 알게 하십니다. 비록 나라가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을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민족, 우리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을 견고하게 하고 구원하시려고 버리지 않으십니다.
스가랴 10:6 상반절에는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라고 합니다. 유다 족속이란 남 왕국을 말합니다. 요셉 족속이란 7절의 에브라임처럼 북 왕국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남과 북 전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것을 알려주십니다. 남과 북 두 나라는 상극이었습니다. 원래 한 민족, 한 나라였지만 나뉘어서 서로 질시하고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나라 사이에서 남과 북이 다 하나님의 백성이며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고 하나님이 구원하실 나라인 것을 말씀하십니다.
남 왕국이 볼 때 북 왕국이, 북 왕국이 볼 때 남 왕국이 원수였습니다. 서로 하나님이 상대 왕국에게 벌을 줬으면 좋겠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둘 다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둘 다 사랑하는 존재이었고, 둘 다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위대성을 보시겠습니까? 그가 우르를 떠날 때에 형님의 아들인 조카 롯을 데리고 함께 갔습니다.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서로 다투자 아브라함은 롯과 갈라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목축하기 좋은 땅인 소돔과 고모라를 롯이 선택하였습니다. 이런 롯의 행동은 배은망덕이었습니다. 위아래도 모르는 부도덕한 일이었습니다. 후에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동방의 4왕이 소돔의 5왕과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소돔이 패전하였습니다. 소돔이 패하면서 롯이 포로로 잡혀가고, 롯의 재물도 다 빼앗겼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집에서 기른 사병 318명을 보내어 롯과 그의 재물을 찾아왔습니다. 아무리 괘씸한 조카이지만 포로가 되는 어려움을 당하고, 애써 모은 재산을 빼앗기자 아브라함은 롯을 살려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배은망덕한 조카가 어려움에 빠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절대 내버리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잘못이 크다고 하더라도 아브람의 혈육이며, 사랑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형들에게 버림받고 팔려가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습니까? 그러나 기근으로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왔을 때에 형들을 용서하고 함께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내버렸지만 요셉은 형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들과 많은 조카들까지 다 보살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의 아량이며 관용입니다.
모세는 어떠했습니까? 모세는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당했습니다. 바로가 남자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어머니는 모세를 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버림을 받았다는 유기감에 열등의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40세가 되었을 때 동족을 도우려고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백성인 히브리사람에게 살인이 발각되어 미디안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미디안에서 40년의 방랑생활을 한 끝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자기 백성을 내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구하러 애굽으로 가서 백성들을 이끈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자기 백성이 모세를 버렸지만 모세는 자기 백성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구약의 예수님의 모형인 요셉이나, 모세나 다 자기 백성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자기 백성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에게 버림을 받고 팔려갔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던 유대인에게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버린 그 사람들을 버리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이 땅에 오셔서 지긋지긋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을 수 없는 하나님이 죽기까지 고통을 당하시고도 우리를 버리지 못하셔서 우리를 영접하러 “다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27:10에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고 합니다. 절대로 버리지 못할 하나님 편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친히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잘못이 있어도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자에게 이유를 묻지 않고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고아와 과부’는 성경에서 가장 불쌍한 자의 대명사입니다. 그들이 왜 불쌍합니까? 당시에 고아와 과부는 버림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돌보아주지 않으면 홀로서기가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버리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버림받은 사람을 받아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버림받은 자가 가장 사랑받는 자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아직 완전히 비어 있지 않다면 주님은 거기서 아무 것도 빚어내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로지 버림받은 이들을 받아주시고 병든 이들만 치료하시며, 눈먼 이들만 보게 하시고, 죽은 이들에게만 삶을 되돌려 주신다. 죄인들만 거룩하게 하시며, 어리석은 이들만 슬기롭게 하신다. 한 마디로 그분은 가엽은 이들에게만 은혜를 베푸신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영국 에딘버러대학교의 교수인 래리 허타도의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이란 좋은 책이 있습니다. 기독교초기 로마제국에서는 영아유기와 더불어 검투사 경기가 유행하였습니다. 당시에 영아유기는 아주 빈번하였다고 합니다. 유기된 아기는 곧잘 죽거나 노예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유기된 아기들은 노예의 수요 충족을 위한 자원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연간 50만 명의 노예가 필요했는데 그 중 15만 명이 유기된 아기를 키워서 충당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내버려지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내버려져서 노예가 되면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나 물건 취급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내버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내버리지 않겠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희망의 기쁜 소식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의 가사에는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복음 그 자체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말씀인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돌아오게 하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스가랴 10:6 하반절에는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이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가 내버린 일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고 합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함께 포로에서 귀환하게 될 것이며 내버린 일이 없음 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10지파가 나라를 형성하였고, 남 유다는 2지파가 나라를 형성하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 침공으로 주전 722년에 멸망하였고, 남 유다는 시드기야왕을 끝으로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유다보다 훨씬 강했지만 136년 먼저 멸망을 당했습니다.
유다백성들은 바벨론에 주전 605년, 597년, 586년 3차에 걸쳐서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후에 주전 538년 고레스의 칙령으로 3차에 걸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주전 538년에는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귀환하였고, 주전 458년에는 에스라를 중심으로 귀환하였고, 주전 444년에는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귀환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3:31에는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며 애통하는 노래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에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으로 어머니는 모세를 버렸습니다. 출애굽기 2:3에는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모세를 버릴 때에 갈대상자에 역청을 칠하여 상자가 물에 가라앉지 않게 하고 모세를 상자에 넣어 버렸다고 합니다.
‘상자’는 히브리어로 ‘테바’인데 노아시대에 ‘방주’를 지칭할 때 사용된 단어와 같은 고어입니다. 어머니가 모세를 버릴 때에 이미 구원의 장치를 하였다는 말입니다. 모세를 넣은 상자는 죽지 않고 구원하는 방주였습니다. 모세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그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6:14에는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 때 일러주신 말씀입니다. 모세를 버릴 때 사용한 갈대상자와 노아의 방주는 닮은꼴이었습니다. 버린 것이 아닌 구원하신 것입니다. 방주 안에 있는 것은 완전히 격리된 것이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것 같지만 사실은 영원히 사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버리는 것 같지만 보호하시고, 건지시고, 구원하십니다. ‘상자’는 버리는 것이 아닌 보호하는 것입니다. ‘방주’는 격리된 것이 아닌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산가족 찾기’ 할 때에 뒷이야기들을 들어보면 난리통에 엄마가 아이에게 “여기 가만히 있어, 엄마 금방 올께”하고 잠시 다녀왔는데 아이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엄마의 ‘금방’은 10분이지만, 아이의 ‘금방’은 1분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찾으러 갔다가 30년, 40년 만에 만나는 광경은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엄마는 버리지 않았는데 버림이 되어버린 아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4:18에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합니다. 다락방강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승천하셨지만 제자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것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셨는데 천년이 하루 같은 예수님께는 이틀이지만 우리에게는 2,000년이 지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는 다시 데리러 오신다는 말씀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4:3에는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버리셨다면 영원히 다시 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트럼프 미국대통령의 최근의 반이민정책을 보세요. 불법이민자의 부모와 자녀를 격리수용하는 반인륜적 정책 때문에 곤혹을 치르고 결국 그 정책을 철회하였습니다. 북미회담으로 노벨상 후보 운운하다가 이 정책으로 노벨상이 물 건너갔다고도 합니다. 격리 수용된 어린이에게는 평생 부모를 잃었다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후로 잠시만 부모가 안 보여도 아이들은 놀란 가슴을 쓰러내릴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에 불과합니다. 행여나 하나님께로부터 버려질까, 떨어질까 염려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찾으러 오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늘 조마조마합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아시고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시편 71:18에는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합니다. 이 간구는 우리 모두의 간절한 기도일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는 이스라엘 남과 북 모든 백성의 굴욕입니다.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옛일을 잊고 행복하게 은혜로 살게 하실 것을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그들에게는 희망이며 기쁨이었습니다.
스가랴 10:1-7에는 하나님의 선민에 대한 회복을 약속합니다. 그들의 농작물이 풍부하게 될 것입니다(1-2). 악한 지배자가 없게 하실 것입니다(3-4). 유다와 이스라엘이 함께 승리할 것입니다(5-7).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내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주십니다. 경제, 정치 그리고 영혼의 평안을 보장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도 영원히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결론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것에 대한 세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잃은 양, 잃은 동전, 잃은 아들인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라는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은 잃은 것을 버리지 않으시고 찾을 때까지 끝까지 찾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내버리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잃은 것도 끝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하나님은 나를 절대로 잊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으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기한 후에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나는 나를 포기하고, 버릴지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하나님께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를 내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팔은 짧지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팔은 나를 버리지 않고 잡아주십니다. “너를 붙들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붙드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합니다.
우리를 어떤 환경에서도 절대로 내버리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이나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손 안에서 든든히 서고 회복되어 속히 남북이 하나가 되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 우리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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