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 가장 놀라운 기적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 세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장차 우리 부활을 예시한 것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에게 말씀으로 명령하셨습니다. “달리다굼”, “청년아 일어나라”,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의 말씀에 이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고 간과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살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과 더불어 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생명 없는 바다나 바람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났습니다. 듣고 순종하면 다시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38년 동안 베데스다라는 못 가에 앉아 있던 병자에게 “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에 병이 나았습니다. 한 편 손이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내밀 수 없는 마른 손이었지만 듣고 순종할 때에 손이 나았습니다. 병자나 죽은 자나 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나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왜 만드셨습니까? 들으라고 만드셨습니다. 왜 귀를 만드시되 두 개를 만드셨습니까? 한 번만 듣지 말고 두 번 들으라고 두 개를 만드셨습니다. 귀를 만드시되 왜 양쪽에 만드셨습니까? 양쪽 말을 다 들으라고 양쪽에 만드셨습니다.
“들을 줄 아는 사람은 말할 줄 알고,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말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듣는 것은 모든 사고와 일의 기초가 됩니다. 많은 사람은 말을 잘 하려고 하지만 지혜로운 하나님의 사람은 잘 들으려고 합니다.
로마서 10:17에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합니다. 듣는 것이 우리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5:24에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합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듣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감각입니다. 청각이란 사람이 태어날 때 가장 완벽하게 발달된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청각은 나이가 들수록 쇠퇴합니다. 그래서 20대가 듣는 소리를 40대나 50대는 듣지 못합니다. 아기들이 태어나서 소리는 잘 듣습니다. 그래서 아기들은 곧잘 큰 소리에 놀라기도 합니다. 사람이 성장하면서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발전합니다.
“듣는 것은 시력을 향상시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 들어야 잘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듣지 못하고 보기만 하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고나 삶 전체에서 기초가 든든해야 빨리 진보하고, 바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공부도 수업시간에 듣는 것이 기본입니다. 우리나라의 공교육이 무너졌다는 비판의 소리를 듣습니다. 학원에서 공부하고 학교에서는 잠을 잔다고 합니다. 수학능력고사 1등을 한 학생들은 한 결 같이 학교공부에 열중하고 수업을 잘 들었다고 합니다. 예습복습을 잘하고 학원에는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학교 공부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공부시간에 잘 듣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학습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그리스도인이 말씀은 듣지 않고 혼자 기도하고 혼자 봉사만 한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엉뚱한 대로 가게 됩니다. 말씀을 잘 듣는 그리스도인이 좋은 그리스도인이며, 살아 있는 신앙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에는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내 아들아 들으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사람들은 들으라”, “비유를 들으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등 들으라는 말씀이 105번이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들을지어다”, “듣고”라는 말씀을 보면 성경에 500번 이상 기록된 굉장히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셨습니다. 기도하시는 가운데 변모하신 예수님의 황홀한 모습을 보고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라고 제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제안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초막을 세우는 것보다 낫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이것이 하늘의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사는 것입니다. 육체가 잘 살고 나아가 영혼이 사는 것입니다.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이 사는 삶을 삽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삶을 삽시다.
첫째, 듣는 자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요한복음 5:24에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고,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듣고 믿는 순간 이미 더 이상 사망이 아니라 생명을 얻고 사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라는 말씀은 복음을 믿고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귀로만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귀로만 들으면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말씀이므로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영으로 들어야 합니다. 영의 귀를 가지고 들어야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의 말씀이 되고 힘이 됩니다.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라는 말씀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예수님을 잘 믿어야 영생을 얻고 생명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현세에서부터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분명히 내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가 사는 동안은 영원이나 영생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살므로 장차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의로 인정받는 ‘의인’(義認)을 지칭하는 말씀입니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라는 말은 이 땅에서 벌써 의로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전인 현세에서부터 심판을 받지 않는 ‘칭의’의 보장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심판에 이르고, 사망에 머물 것입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사망에 머물러 생명이 없이 육체가 죽게 되면 영원한 심판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마태복음 19:16에는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젊은이의 질문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율법시대에 율법교사가 영생에 관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다는 자체가 주목할 만한 인물입니다. 그는 재물이 많은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그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와서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22절에는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합니다. 그는 위대한 질문을 가지고 왔고, 질문에 대한 해답을 들었지만 듣고도 지키지 못하므로 영생과 멀어진 안타까운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보면 초대교회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첫째는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은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베드로의 긴 설교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37에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이라고 합니다. 38절에는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합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한 다음에는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 영혼이 살고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7장에는 스데반의 긴 설교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7:2에는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라고 시작하여 아브라함의 선례를 들어 복음을 제시합니다. 설교를 할 때에 57-58절에는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라고 합니다. 스데반이 구원을 전하는 말씀을 그들은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말씀을 전하는 스데반을 도리어 돌로 쳤습니다.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말씀 전하는 자를 돌로 쳐 구원을 역행하였습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에 제일 먼저 빌립보에 들어가서 전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빌립보에서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을 고쳐주므로 여종의 주인에게 고소를 당하여 끌려가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사건이 있습니다. 한밤에 바울과 실라가 찬송하는 중에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렸고, 간수는 바울과 실라가 도망한 줄로 알고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도망하지 않았으므로 자결하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사도행전 16:30에는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간수가 바울에게 묻습니다. 그 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말씀을 잘 듣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간증을 두 번이나 적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서 바울이 간증을 했을 때 백성들은 듣고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6장에서는 베스도가 듣고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이 간증은 복음의 박해자에서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한 기적이었고, 그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었지만 그들은 아예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듣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교회의 교인이었던 월남 이상재선생이 독립운동에 한참일 때에 한 친일파 기자가 돈뭉치를 들고 와서 매수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돈뭉치를 내밀면서 “선생님, 이 돈으로 시골로 내려가서 편히 사시지요”라고 했습니다. 월남선생은 그 돈을 밀어내면서 “여보시오, 나는 돈으로 사는 자가 아니요. 나는 말씀으로 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자가 “인도의 간디는 백세를 산다고 했고, 영국의 누구는 얼마 동안을 산다고 장담했는데 선생님께서는 몇 살이나 사시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월남선생은 “이 사람아, 사람이 한 번 태어났으면 영원히 살지 죽긴 왜 죽나?”라고 하였습니다. 기자가 다시 “진시황은 불사약을 구해 먹었어도 결국 죽었는데 무슨 불사약이라도 잡수셨습니까?”라고 하자 “그래 먹었지, 너희 일본 천황이 먹지 못한 것을 나는 먹었지. 나는 영생 불사약을 먹었기에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일본이 망하는 것을 볼거야”라고 하였습니다. 기자는 다시 “그 불사약이 뭡니까?”라고 하자 월남선생은 “불사약은 바로 이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는 이 말씀을 믿고 산다. 이 말씀을 믿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고 부활한다”고 하였습니다. 월남선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영생의 확신을 가지고 사신 자랑스러운 연동교인입니다.
둘째,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요한복음 5:25에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이미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영적으로 중생하게 됩니다. 귀가 아닌 심령으로 듣는 자는 영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는 살 자가 없습니다.
“이 때라”는 말은 영원한 현재를 지칭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바로 그 때에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많은 시간을 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들으면 그 때에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성경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를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영생하고, 들으면 삽니다. 귀로만 들은 사람이 아니라 가슴으로 들은 사람이 그 말씀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수 없이 많이 들었습니다. 신약의 백성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들었습니다. 5천명이 예수님께 나와서 말씀을 듣고 먹었습니다. 그리고 4천명이 말씀을 듣고 먹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후에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른 사람들이 아닙니까? 귀로 듣고, 입으로 먹은 자들은 다 헛된 일을 한 자들입니다.
눈과는 달리 귀에는 꺼풀이 없습니다. 눈은 감으면 안 보이지만 귀는 늘 열려 있습니다. 소리는 귀가 있는 사람에게는 항상 들립니다. 열린 귀로 잘 듣는 자는 복 있는 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영적 생활도 듣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영혼으로 향하는 두 개의 통로는 귀와 눈입니다. 그런데 귀가 왜 눈보다 중요한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계시하시고, 약속을 이루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알려주시고 이루시기 때문에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은 듣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은 “듣고 묵상하라”고 합니다. 찬송은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내어 부르라”고 합니다. 기도는 “부르짖으라”고도 하고, “은밀히 하라”고도 합니다. 말씀은 듣는 것이므로 귀를 기울여야 하고 마음에 새겨 묵상해야 합니다.
영성적인 사람은 보는 것보다 듣는 것에 열중합니다. 듣는 것이 사는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를 듣고 자신의 마음에 새겨지는 ‘레마로 만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의 표시는 설교하는 혀가 아니라 귀를 기울이는 마음이다”라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항상 내면의 소리에 귀룰 기울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을 많이 하고, 잘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작은 소리까지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작은 소리, 남이 듣지 못하는 소리까지 민감하게 잘 듣는 사람입니다.
노만 아우구스틴은 “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 비난은 있지만 너무 많이 듣는다는 비난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은 적게 할수록 좋고, 많이 들을수록 좋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습니다. 많이 하는 것보다 많이 들어야 합니다.
무디목사님이 헌신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어릴 때 부흥회에 참석하여 헤네스 발렐이란 영국 목사님의 설교에 크게 감동을 받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만 있으면 그를 통해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더 큰 일을 할 수가 있다”고 설교하였습니다. 돈이 많다든가, 재주가 많다든가, 지식이 많은 것이 아닌 온전히 헌신하는 자라야 한다는 이 말씀을 듣고 무디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의 생애를 온전히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고 고백했습니다. 무디목사님은 미국의 경제 공황기에 100만 명을 주님께 전도하는 엄청난 기적의 일꾼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듣고 온전히 헌신한 자를 하나님은 쓰십니다.
한국갤럽의 조사에 의하면 최근 20, 30대 인구 중에서 종교를 믿는 수치가 급감하고 있습니다. 10년 전에는 20대의 45%가 종교를 가지고 있었지만 현재는 31%로 14%나 감소하였습니다. 30대도 49%이었지만 38%로 11%가 감소하였습니다. 무종교인에게 믿지 않는 이유를 물었더니 45%가 ‘관심 없어서’라고 하였습니다. 향후 10년, 20년 후에는 더욱 관심이 없어질 것이고 종교인구가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조사에 의하면 현재 그리스도인 44%가 이름만 가지고 있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 33%는 자신이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얻은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도덕적 관심이 복음적 관심보다 더 큽니다. 성경보다 일반 종교서적을 선호합니다. 결국 말씀을 듣지 않으면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에스겔 37:5에는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고 합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다른 뼈들과 서로 붙어 사람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뼈 위에 살이 생기고 피부가 덮였습니다. 사람의 모습은 온전히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말씀을 듣고 생기가 들어가야 살아나 힘 있는 군대가 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갈 때에 비로소 마른 뼈들이 큰 군대가 됩니다.
결론
14세기의 은둔자 리처드 롤은 “죽음에서 살아나려면 최소한 게으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게으름이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무너뜨립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말 것을 권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육신의 병이 낫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삽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병든 자와 죽은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병이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영혼의 귀로 들으면 죽은 영혼이 살고, 장래에 영원히 삽니다.
죽어서 들판에 널려 있던 마른 뼈들은 아무 힘이 없이 무기력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생기가 들어가면 생동하는 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생기가 들어가기 전에는 군대가 아니었지만 생기가 들어가자 크고 힘 있는 군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기 전에는 아무 힘이 없지만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나서 우리교회, 우리나라를 일으키는 힘 있는 군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 생명이 넘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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