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우리는 흔히 ‘서울에 올라가다’, ‘고향에 내려가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오랜 언어 습관 가운데 수도를 기준으로 쓰는 관습어가 서울은 올라간다고 하고, 서울에서 지방은 내려간다고 합니다. 오랜 인류의 전통 속에서 지도에 북쪽이 위쪽이므로 북쪽으로 가는 것을 올라간다고 할 것 같지만 동서남북에 관계없이 서울로 가는 것을 올라간다고 합니다. 옛날 수도는 임금이 계시던 곳이기에 올라간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지역의 지리적 지위 내지 위상이 높다면 ‘올라가다’라고 쓰게 된 것입니다.
옛날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갔습니다. 과거에서 급제하면 한양에 올라가 있었고, 과거에서 낙제하면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낙마’(落馬)라는 말이 있는데 문자적으로는 말에서 내려오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떤 지위나 출세 길에서 떨어지는 것을 낙마라고 합니다. 지위가 떨어지므로 말에서 내려 걸어 다니는 것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상경(上京)이란 말은 서울로 올라간다는 말이고, 낙향(落鄕)이란 말은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말입니다. 옛날 임금의 궁이 있는 도읍을 중심으로 이른 말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어딜 가든 항상 내려가게 됩니다.
성경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라는 단어가 40번 나옵니다.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라는 말은 20번 나옵니다. 성경에는 ‘올라가다’라는 표현이 상당히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는 누가복음 10:30에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는 내려간다고 하는데 의미적으로도 내려간다고 하고, 실제로 여리고는 예루살렘보다 지형이 낮으므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설교에서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난 이유는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세속적 도시 여리고로 내려갔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지방인 여리고로는 ‘내려가다’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90미터의 팔레스타인 중앙산맥의 분수령 상에 있는 도시입니다. 지리적으로도 다른 도시에서 예루살렘에 가려면 올라가야 합니다. 더구나 예루살렘 성전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던 모리아산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올라가야 하고, 모리아산에 있는 성전에 가려면 올라가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여러 번 세워지고 파괴되었습니다. 제1성전인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제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은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이 귀환할 때 스룹바벨이 돌아와서 세웠습니다. 그런데 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제3성전인 헤롯 성전은 에돔 사람인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세웠습니다. 후에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통곡의 벽’이라는 유적지가 있습니다. 이곳은 제3성전의 서쪽 벽의 잔해의 일부분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성전을 여러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성전, 성소, 여호와의 집, 주의 집, 하나님의 집, 주의 전, 여호와의 처소, 주의 장막, 여호와의 궁정, 주의 제단, 주의 집, 주의 궁정, 하나님의 성전, 여호와의 성전, 하나님의 성전 등입니다. 그렇게 다양하게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그만큼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20편에서 134편까지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이 시편들의 제목도 ‘성전에 들어가는 노래’, ‘성전에 가는 노래’라 하지 않고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은 올라가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방에서부터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옵니다. 멀리서 황금 돔이 있는 성전을 바라보면 눈부실 정도로 찬란하고 감격과 기쁨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성전에 오르는 것은 그 자체가 감동이며 기쁨이었습니다.
시편 122편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이라 부르는 무교절, 보리를 수확하는 절기이며 맥추절이라고 부르는 칠칠절, 가을추수의 절기이며 수장절이라고 부르는 초막절에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던 찬송입니다. ‘순례자의 노래’라고 하는 이 찬송은 여호와의 면전에서 예배하는 벅찬 감격을 노래한 것입니다. 우리도 주의 전인 예배당에 나올 때마다 이런 감사와 감격이 있기를 바라며 교회에 나오는 기쁨이 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루살렘이 성전 때문에 잘 짜여진 성읍이 되었습니다.
시편 122:3에는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계획도시입니다. 성안의 건물들이 빼곡히 잘 정리 되어 있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고, 포로시대 이후에 완전히 복구 되어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살렘(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예루살렘은 늘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평화의 적은 항상 있습니다. 평화하지 못하게 하는 악의 세력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은 끊임없는 갈등과 고통과 슬픔의 도시였습니다. 수없이 침략을 당하고 박해를 반복한 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마치 우리 인생의 닮은꼴입니다. 예루살렘은 4천년을 이어오면서 평화는 커녕 전쟁과 갈등과 비극의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은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의 성지입니다. 예수님의 유적지마다 종교가 쪼개어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 가면 천주교가, 어느 곳에 가면 정교회가, 어느 곳에 가면 그 외의 기독교가 관리하고 있어서 예배나, 행사가 다 다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거룩과도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루살렘이 성지입니까? 왜 역사적인 도시입니까? 왜냐하면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역사가 담긴 곳이며, 성전 때문에 잘 짜여진 성읍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모리아산 꼭대기에 황금돔으로 장식한 성전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시온의 영광이 빛납니다. 그 아래로 기드론 시내가 흐르고, 시내 건너편에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보면 예루살렘 성전이 더욱 찬란하게 잘 보입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성전 중심의 도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올라갈 때 멀리서 높은 산 위에 우뚝 서 있는 성전을 바라볼 때 얼마나 가슴이 설레고 황홀했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다녀온 후에도 그들은 예루살렘을 잊을 수 없고, 절대로 빼앗기고 잃을 수 없는 도시인 것입니다.
시편 116:19에는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중심이 성전이라고 시편의 기자는 노래합니다. 지리적으로 상징적으로 예루살렘은 성전이 중심이었습니다. 성전이 없으면 예루살렘도 무의미하고 거룩한 도시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공동체는 교회의 원형이며 삶의 모형이었습니다. 광야공동체는 성막이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세우게 하셨고, 성막에서 만나겠다고 하셨고, 성막이 완성되자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광야생활을 하였습니다. 성막이 움직이면 함께 움직이고, 성막이 멈추면 함께 멈추었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가, 남쪽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지파가, 서쪽에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지파가, 북쪽에는 단, 아셀, 납달리지파가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광야생활은 60만 명이 함께 살면서 혼잡하고, 질서가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잘 짜여진 광야도시였습니다. 성막이 없다면 중심이 없이 혼란했겠지만, 성막이 중심을 이루었기에 잘 짜여진 마을이 된 것입니다.
중세 유럽의 도시들을 보면 거의 모든 도시가 중앙에 광장이 있고, 광장에는 시청과 교회가 마주보고 있습니다. 어느 도시나 행정을 책임지는 시청과 신앙을 책임지는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도시들을 보면 잘 짜여진 계획도시입니다. 시청과 교회가 도시의 중심으로 설계된 도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럽의 전통도시들은 교회가 도시의 중심입니다. 도시마다 가장 높은 건물이 교회이고, 가장 화려한 건물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도시의 중심이 되어야 도시가 견고합니다. 도시의 영적 중심을 잃으면 예배당이 팔리게 되고 더 이상 예배당이 아닙니다. 예배당이 식당으로 변하고,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관광상품점으로 전락하는 것은 도시의 중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도시의 영적 기능을 상실하고 정신적 중심이 되지 못하면 결국 도시도 중심을 잃고, 타락하고, 쇠퇴합니다. 무수한 유럽교회들이 중심을 잃게 되자 도시의 쇠퇴를 자초하고 가속화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원래 불교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천주교와 기독교는 도시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도시는 교회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발전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최초로 세워진 새문안교회나 정동교회가 당시에 서울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였습니다.
평양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양의 장대현교회는 아주 위치가 멋진 곳입니다. 그곳은 지금 김일성, 김정일의 큰 동상이 세워진 만수대입니다. 북한에서 최초로 세워진 감리교회가 남산현교회인데 그 자리에 지금은 인민학습당이 서 있습니다. 원래 평양도 교회가 도시의 중심이었습니다. 평양이 다시 교회가 중심인 도시가 되기를 바랍니다. 북한의 봉수교회, 칠골교회가 바른 교회의 구실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양을 예전에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하였는데 그 명성과 자리를 찾기를 기대합니다.
어느 설문조사에 의하면 일반인의 교회에 대한 불만 1위가 ‘일요일에 너무 시끄럽다’라는 것으로 29.9%를 차지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전도를 심하게 한다, 주차문제를 야기한다, 교통이 복잡하다, 믿음에 대한 강요가 심하다, 가정방문 전도를 한다 등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위한 교회가 되고,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어야 불만도 사라질 것입니다. 지역사회를 외면하는 교회는 결코 사회의 중심이 되지 못합니다.
교회의 존재가치는 사회를 부흥시키고, 지역을 발전시키고, 주민을 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회중심의 교회가 참 교회입니다. 교회가 사회를 유익하게 하고 교회 주변의 주민들이 교회를 반겨야 교회가 중심이 됩니다. 교회가 있으므로 그 동네의 땅값이 내리면 잘못된 교회입니다. 사회의 중심이 되지 못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참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멀리서 교회에 올 때 종탑만 봐도 가슴이 설렙니다. 홀로 낮에 깜깜한 예배당에 들어와 기도하고 앉아 있으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찬란합니다. 우리교회가 종로5가라는 이 지역의 중심이 되고 랜드마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은 성전 때문에 잘 짜여진 도시입니다. 교회 때문에 서울이 잘 짜여진 도시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부에서는 종로5가를 ‘기독교 1번지’라 칭한다고 합니다. 종로5가가 우리교회 때문에 ‘기독교 1번지’가 되고 우리교회가 이 지역의 중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모든 지파가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성전에 올라갑니다.
시편 122:4에는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라고 합니다. 모든 지파, 모든 여호와의 사람들이 한 결 같이 성전에 올라가서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시편 122편은 나라가 유다와 이스라엘, 남북으로 분단되기 전 통일왕국 시기에 지어진 시라고 봅니다. 분단되기 전의 모든 구원받는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모습을 그려놓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배는 예수를 믿는 목적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예배는 절대 필수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참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자를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가족, 우리 성도들이 빠지지 않고 교회에 올라오기를 즐겨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일이면 빠짐없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할 줄 알아야 좋은 성도입니다.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모두가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전례’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에두트’라는 단어인데 ‘증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주신 규례와 약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와 약속을 따라서 백성들이 성전에 올라온 것입니다.
출애굽기 23;17에는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라고 합니다. 일 년에 3차례 성전에 올라오라고 하나님께서 규례를 만드셨습니다. 성경대로 한다고 요즘에도 일 년 세 번만 교회에 나오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0:7에는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교회가 세워지고 안식 후 첫날에 모여 예배하였습니다. 안식 후 첫날만 오면 되는데 어떤 이에게는 안식이 너무 깁니다. 매 주일마다 예배를 위하여 모인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교회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리로 올라가는도다”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약속과 주신 규례를 어기지 않고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중심지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다윗 왕가의 정부 소재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종교적 중심지이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36:23 하반절에는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라고 합니다. 기원전 538년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이스라엘의 포로들이 귀환할 때 고레스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올라갈지어다”라고 한 말은 대단한 표현입니다. 페르시아는 당시에 세계최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에는 올라가는 것입니다.
고레스는 이스라엘 해방을 위해 예비한 구약적 메시야의 상징입니다. 고레스는 이방 왕이었지만 “하늘의 신 여호와”이라고 하나님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고 할 만큼 예루살렘을 성전을 건축할 거룩한 도시라고 인정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올라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배는 감사입니다. 감사는 예배를 통하여 표현됩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갖게 하시려고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이 가장 거룩한 예배의 내용입니다.
영국작가 아이작 윌튼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모두 두 곳이다. 하나는 천국이요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심령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감사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감사하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의 대가에 대한 우리의 감사의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15:1에는 모세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15:21에는 다시 미리암이 노래합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구원의 노래는 예배의 찬양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우리의 감사이며 찬양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찬양의 구절은 성경에 여러 번 반복되는 고백입니다. 특히 시편 136편은 26절 전체가 이 말씀이 반복되는 감사의 찬송입니다. 성경은 감사가 예배찬송이며, 삶의 고백인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다른 종교의 어떤 경전보다 ‘감사’란 말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감사의 종교’라고 합니다. 감사란 은혜 받은 자가 은혜 베푼 자에게 고마움을 보답하는 뜻으로 마음과 행동 그리고 입술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 곧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감사란 말의 헬라어 ‘유카리스타’(eucharista)는 은혜라는 ‘카리스’(charis)라는 말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의 심정에서 비롯됩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진정한 예배의 삶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면 하물며 예배에 감사가 없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열심히 성전에 올라왔던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예배는 분명한 장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흘 길을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희생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드리는 제사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야 하나님께 대한 바른 제사가 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주일 아침 늦잠을 자서 급히 와도 축도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동네교회나 아무데나 갈 것이 아니라 우리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교인의 자세이고, 그것이 바른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깊은 경지의 예배는 고통 가운데서도 예배하고, 시련 가운데서도 감사하고, 시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나의 삶을 드리며,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에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에 목숨을 거십시오. 주일에 교회에 나오되 기쁘게 노래하면서 주의 전에 올라오십시오. 주의 전에서의 하루가 세상에서의 천 날 보다 나은 것을 알고 교회에 나오며 주의 전에 올 때마다 예배의 기쁨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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